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숙필(叔弼), 호는 철애(鐵厓). 형조정랑 이계록(李繼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덕일(李德一)이고, 아버지는 이홍재(李弘載)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1년(숙종 7)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89년(숙종 15)에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이 때 고을의 선비들이 당(黨)을 나누는 데 분노하여 옥에 가두고 형신(型訊: 죄인을 杖刑으로 신문함.)하다가 다섯 사람이 죽은 사건으로 치죄되었다.
이후 승지를 역임하고 1694년(숙종 20)에 사헌부 지평으로서 장희재(張希載)의 언찰(諺札: 한글로 된 편지)로 인한 무옥(誣獄)이 크게 일어나자, 이를 더욱 엄중히 조사하여 국법으로 처리하여야 하며 인정에 이끌려서는 안된다고 탄핵하였다.
1699년(숙종 35)에 효종·현종·숙종 대의 세 조정을 거쳐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었던 나이 70세가 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특별히 자급(資給)을 올려 주었는데, 여기에 포함되어 가자(加資: 당상관 이상의 품계에 오름.)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는 대개 이세익이 효종대에서는 승문원과 병조의 관직을 역임하였을 뿐 시종은 거치지 않았으면서도 가자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