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희(伯喜). 호는 지재(止齋). 이극견(李克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반(李攀)이다. 아버지는 이영부(李英符)이며, 어머니는 이효완(李孝完)의 딸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1년 주서(注書)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 때 국왕이 홍문관의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을 갖춰 왕에게 올리는 글)를 두고 변명의 구실을 찾자, 이는 언로(言路)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여론에도 좋지 않다고 직언하였다.
1544년(중종 39) 헌납이 되어서 조광조(趙光祖)의 죄를 대변하면서 “조광조가 옛날을 사모하여 과격하게 했다는 것으로 죄를 주었다면 마땅하지만, 지금에 와서 한 때의 잘못 때문에 영구히 이수경의 직첩을 거두어 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1546년 시독관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다. 이 때 이휘(李煇)·이중열(李仲悅) 등의 역모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는 윤원형(尹元衡) 일파인 진복창(陳復昌)이 이수경을 미워하여 폄출(貶黜: 벼슬을 강등시키고 쫓아냄.)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원종공신록(原宗功臣錄)에서 훈적(勳籍: 공훈을 기록한 문서)을 박탈당하고, 1551년(명종 6) 유배지 온성에서 서울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