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로(景老). 세종대왕의 사자(嗣子)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산군(輪山君) 이탁(李濯)이다. 아버지는 신성군(新成君) 이매(李梅)이며, 부인은 청풍김씨 참봉 김저(金樗)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으로 피난하는 국왕을 호종하다가 개성에 이르러 임금이 묘사주(廟社主: 종묘·사직의 신주)를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뜰에 매안하도록 하라는 명을 전해듣고, 왜적의 침공이 급박함을 들어 북으로 모실 것을 주장하였다.
임금이 이수곤의 뜻을 대신들을 통하여 전해듣고, 종묘제조(宗廟提調)에게 명하여 이를 모시고 오게 하여 보전하게 하였다. 얼마 뒤 개성이 함락되었을 때, 묘사의 신주는 이미 북행한 뒤였다.
이듬해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평양의 왜적이 소탕되고, 적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광해군을 따라 양호(楊鎬)의 군사를 위무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적군이 계속 영남 지방에 진을 치고 있음을 보고 울분하던 끝에 이듬해 정월 병사하였다.
재상 이항복(李恒福)·이호민(李好閔)·이제민(李齊閔) 등의 건의로 뒤에 충신효자로서 정문이 세워졌다. 선조는 충근정량 호성공신 소덕대부(忠勤貞亮扈聖功臣昭德大夫)를 추증하고 절신군(節愼君)에 진봉하였다. 광해군은 즉위 후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추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