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덕이(德而). 이세정(李世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의규(李宜揆)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이보순(李普淳)이며, 어머니는 김성유(金聖游)의 딸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에 초임되었다.
1763년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근무 태만으로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1765년 비변사낭청으로 재직 중, 영남 지방의 창곡 관리에 소홀했다는 탄핵을 받고 유배당했다가 곧 다시 등용되어 사간원헌납·사헌부지평을 지냈다. 1768년 세자시강원사서, 이듬해 문학·정언·수찬 등을 지냈다.
경관직에 있으면서 성리학에 밝아 경연에 자주 나갔으며, 이 때 홍대용(洪大容) 등과도 교제하였다. 1774년 대사간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승지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동지부사로 정사 김익(金熤)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 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 해 대사간에 재임되었다.
1784년 정조의 명으로 사대문서(事大文書)를 편집하기 위해 승문원·사역원에서 구적(舊籍)을 가지고 교정을 하던 중 집에 불이 나 조(詔)·칙(勅)·표(表)·주(奏)·계(啓)·자(咨)의 문서 13편과 사역원의 서적들이 소실되었다. 1787년 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는데, 당시 문제가 있던 무산 지방의 양전(量田)을 다시 하도록 조정에 청하기도 하였다.
이 해 승문원제조로 국왕의 명을 받아, 조·자·표·주 및 사신별단(使臣別單)·역원수서(譯院手書) 등을 채집해, 원편 25항목, 별편 14항목, 보편 5항목, 부편 14항목을 한 책으로 만들어 의정부와 각사에 나누어주었다. 1789년 함경도관찰사로 있던 중 죽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효간(孝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