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李鈺)은 조선 후기에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문학 작품을 저술한 문인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 등이다. 정조(正祖)의 문체 반정(文體反正)에 반하는 파격적이고 독특한 문체로 인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자 전원 생활을 하면서 저작 활동을 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 · 매사(梅史) · 매암(梅庵) · 경금자(絅錦子) · 화석자(花石子) · 청화외사(靑華外史) · 매화외사(梅花外史) · 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이다. 그의 고조부는 이기축(李起築, 1589~1645)이며, 그의 집안은 한미한 무반계의 서족(庶族)으로 당색은 북인계이다. 아버지 이상오(李常五)의 3남이고, 어머니는 홍이석의 딸이다.
이옥의 생애는 그 자신의 글과 친구인 김려(金鑢, 1766~1822)의 문집 발문에 의하여 추정한 것이다.
초년의 성장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30세를 전후하여 서울에서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다. 실록에는 1792년(정조 16)에 그가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소설 문체를 써서 선비들이 답습했다고 전한다. 그 폐해가 극심하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에 과거에 나아가도록 명했다. 그러나 다시 나간 과거에서도 여전히 문체를 고치지 못했기에 군대에 편입되도록 명을 받았다.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적되어 3일 동안 머물렀다. 다시 과거 시험을 보아 1796년(정조 20) 별시 초시(初試)에서 1등을 차지했으나 이때에도 역시 문체가 문제 되어 방말(榜末)에 붙여진다. 그 뒤 1799년(정조 23)에 삼가현에 소환당하여 그곳에서 넉 달 동안 머물렀다. 이후 서울에 돌아와서는 본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으로 내려가 전원 생활을 하면서 저작 활동을 했다.
이옥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의 합리주의로써 불교의 신비 체험적 원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도교의 오행 상생설(五行相生說)에 대해서도 그 부당함을 설파했다. 그러나 문체 파동을 겪고 현실에서 소외되고 나서부터는 전반기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허무주의적인 의식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의 변화는 신비 체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록한 글 등에서 확인된다.
이옥의 저술은 친구인 김려가 교정하여 『담정총서(潭庭叢書)』 안에 수록한 11권의 산문과, 『예림잡패(藝林雜佩)』에 시 창작론과 함께 남긴 이언(俚諺) 65수가 전한다. 『담정총서』 안에 수록한 11권의 산문은 각각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문무자문초(文無子文鈔)」 · 「매화외사(梅花外史)」 · 「화석자문초(花石子文鈔)」 · 「중흥유기(重興遊記)」 · 「도화유수관소고(桃花流水館小稿)」 · 「경금소부(絅錦小賦)」 · 「석호별고(石湖別稿)」 · 「매사첨언(梅史添言)」 · 「봉성문여(鳳城文餘)」 · 「묵토향초본(墨吐香草本)」 · 「경금부초(絅錦賦草)」 등이다. 이 가운데에는 전(傳) 23편을 비롯하여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닌 글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예림잡패』에서는 시를 창작하는 이론을 ‘3난(難)’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또 4조(調)로 나누어 각 조에 10여 편씩의 이언을 창작했는데 조선 후기의 시풍 경향과 밀착되어 민요풍의 정서를 담았다.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 사이의 애정 또는 시집살이의 고달픔 등을 그려내고 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靑邱野談)』에서는 「동상기(東廂記)」를 그가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옥의 작품은 정조의 문체 반정(文體反正)의 희생물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산문과 시는 조선 후기 문학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을 대변하는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