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여달(汝達), 호는 구암(龜巖). 처사 이구취(李矩就)의 아들이다. 12대조인 선전관 이겸(李謙)이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가서 살게 된 뒤로 대대로 그곳에 거주하였다. 이재형(李載亨)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1798년(정조 22) 전국의 경학에 밝은 선비들을 뽑아들일 때 함경도의 추천을 받았으며, 구경(九經)에 대한 정조의 친문(親問) 60여 조에 적절히 대답하여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병으로 나가지 않다가 함경도 분교관(分敎官)으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많은 선비들을 훈도하였다.
이 때 중앙에서 경학서적과 『아송(雅誦)』·『주서백선(朱書百選)』 등 주자학 관계서적을 하사받았다. 1801년(순조 1) 의금부도사를 거쳐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장릉령(莊陵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경학과 예학을 논하는 것이 평이하면서도 명백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생활태도를 지녔다. 제학(提學)에 추증되었으며, 함경도 경성의 도북서원(道北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구암집』 16권 8책을 남겼다. 조선 후기 함경도 유교 지식인의 생활양상이나 그들에 대한 중앙의 정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