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우 ()

영화
인물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촬영기사로 촬영, 현상, 녹음 등의 기술 분야를 개척한 영화인. 영화제작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1978년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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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촬영기사로 촬영, 현상, 녹음 등의 기술 분야를 개척한 영화인. 영화제작자.
개설

서울 출신.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촬영기사로서 촬영·현상·녹음 등의 기술 분야를 개척하였다. 1921년에 공성학교(共成學校)를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아버지가 경영하는 시계포에 사진부가 신설되자 그는 소학교 졸업 이전부터 아우 명우(明雨)와 함께 사진의 촬영·현상·인화작업에 관심을 가졌다. 소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1913년우미관(優美館)의 영사기사로 종사하면서 영화기재에 관한 기술을 익혔다.

17세 때 영화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 있는 제국키네마 계통의 고사카촬영소(小坂撮影所)에서 촬영과 현상기술을 배웠다. 1920년 초에 귀국한 그는 마침 연쇄활동사진극의 제작을 계획중이던 문예단(文藝團)의 이기세(李基世)와 만나 <지기 知己>를 촬영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가 되었다.

이어서 연쇄활동극 <황혼>·<장한몽> 등을 촬영하였고, 1924년 단성사 촬영부의 전속기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체육기록영화인 <전조선여자올림픽대회>를 촬영하였고, 순전히 한국인에 의해서 제작된 <장화홍련전>의 촬영·현상·편집을 맡음으로써 영화기술 분야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는 촬영 분야뿐만 아니라 각색·감독·제작 등 영화 전반에 걸쳐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1925년이구영(李龜永)과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쌍옥루 雙玉淚>를 각색, 촬영하였고, 1926년 반도키네마를 창립하여 <멍텅구리>를 각색·감독·촬영하였다. 1927년 극동키네마를 설립하여 <낙원을 찾는 무리들>을 촬영하였고, <낙양의 길>에서는 각색·감독·촬영을 맡았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 제작된 발성영화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자, 그는 토키장치의 연구에 몰두하여 연구를 시작한 지 7년 만인 1933년 7월에 드디어 PKR발성장치 개발에 성공하였다. 1935년 이 장치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완성됨으로써 한국영화는 새로운 발성영화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영화촬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6·25전쟁 때에는 해군촬영대 소속으로 해군기록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는 초창기 한국의 영화기술 분야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선구자이며, 녹음장치의 개발자이자 감독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총서』(한국영화진흥조합, 1972)
『한국영화발달사』(유현목, 한진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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