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례(元禮), 호는 예남(蘂南)·정졸재(貞拙齋). 예조정랑 이필행(李必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후징(李厚徵)이고, 아버지는 도승지 이시만(李蓍晩)이며, 어머니는 이시함(李時함)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하여 정자·봉상시직장·평안도도사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장령 등을 지내고 1704년에는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6년에 집의·사간·경연관 등을 거쳐 성천부사·순흥부사 등으로 나가 학문과 정치 및 근검에 힘썼고, 1712년 다시 사간·남학교수(南學敎授) 등을 역임하고 1716년에 사직하였다.
그 뒤 1721년(경종 1) 다시 순천부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수찬·응교를 거쳐 의주부윤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간·경상도관찰사·호조참의·강릉부사에 이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판결사·공조참판 겸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727년(영조 3) 예조참판·형조참판·대사헌 겸 비변사당상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다시 형조참판 겸 승문원좨주를 역임, 1743년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고, 한성부판윤·대사헌 겸 선공감제조·공조판서를 거쳐, 1747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계하여 서추(西樞)에 배속되었다. 영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경전차의(經傳箚疑)』·『송현제서증해(宋賢諸書證解)』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