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한유(韓有). 영일(迎日)출신. 이언적(李彦廸)의 후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주살을 외치며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이듬해 4월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모든 일을 계획, 지도하였다. 이한구의 의병부대는 주왕산·약곡(藥谷)·청하(淸河) 등 각지의 전투에서 선봉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재봉기를 도모한 이한구는 1907년 9월 정용기와 함께 재기하여 청송의 신성(薪城)전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이어 자양(紫陽)전투에서 일본군 분견소장을 생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1일 강원도로 북상 도중 영일 입암리(立巖里)전투에서 정용기·손영각·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