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학여(學余). 대사간 이덕부(李德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원배(李元培)이고, 아버지는 이서회(李瑞會)이다. 어머니는 정택빈(鄭宅彬)의 딸이다.
1801년(순조 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02년(순조 2)에 홍문록(弘文錄) 5점을 받았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다.
이듬해에는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1804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진되었다. 1805년에는 대사간을 지냈으며 이듬해 이조참의(吏曹參義)를 지냈다. 1806년에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재직하면서 신천(信川)과 재령(載寧) 지역의 침수 민가가 61호였음을 보고하였다.
1808년에는 이조참의를 지냈고, 1809년에는 승지(承旨)를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참판을 지냈다. 1811년에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고, 1813년에는 대사간을 지냈으며, 이듬해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15년에 부제조를 지내다가 가의대부(嘉義大夫)가 가자(加資)되었다.
그 해 정경(正卿)이 되었으며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대사헌, 공조판서(工曹判書), 좌참찬(左參贊)을 두루 역임하였다.
1817년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대호군(大護軍)과 좌참찬을 역임했다. 1819년에 대사헌으로 활동했으며, 1821년 진주정사(陳奏正使)로서 청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우참찬·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23년에는 좌참찬·판의금부사, 형조판서로서 재직하면서 서얼허통(庶孼許通:서얼의 관직 진출을 법적으로 허용함) 논의에 참여하여, 서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나아가 인재를 모두 등용,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도록 해야함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