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성방(聖方), 호는 치재(巵齋). 임양(任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윤원(任胤元)이고, 아버지는 형조참판 임수적(任守迪)이며, 어머니는 유이정(柳以井)의 딸이다.
숙종 때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2년(경종 2) 황감시(黃柑試)에서 일등하여 전시에 직부(直赴)되고, 이듬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한관을 역임하다가 1728년(영조 4) 지평에 올랐다.
다음해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의정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고, 그 뒤 수찬 · 부수찬 · 정언 · 교리 · 부교리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731년 수찬으로 탕평책에 따른 시정의 폐단을 건의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다.
1735년 사간이 되었고, 다음해에 응교로서 중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승지가 되고, 1740년 대사간에 올랐다. 그 뒤 대사간 · 승지 · 이조참의 등을 거듭 역임하다가 1748년 곡산도호부사가 되어 외직에 나갔고 2년 후에 대사성이 되었다.
고금의 시가에 능했으며 글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저서는 『호재집』, 글씨는 해주축성비(海州築城碑), 개성의 계성사비(啓聖祠碑)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