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방의 축조 등 토목공사를 관장했던 책임자이다. <영천청제비병진명 永川菁堤碑丙辰銘>(법흥왕 23, 536)에 의하면 “將上三 將作人七千人 △二百八十方(장상 3명, 장작인 7천명, ○280방)”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장상의 의미는 ‘장작인을 거느리고 작업하는 우두머리’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장작(將作)’이란 이름은 본래 중국 진(秦) 이래로 토목공사를 맡은 관부이름이었다.
신라에서도 법흥왕 23년에 ‘장작’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더욱이 장작인 7000명은 1개조 25명씩 280개조로 편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6세기 전반에 신라에는 이미 일반 역부와 장인들을 징발할 수 있는 매우 정비된 체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체계가 어떤 관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장작’의 명칭이나 일련의 노동력 동원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중국과의 교류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 같다.
이 시기 중국 양나라에는 장작대장경(將作大匠卿)의 이름이 보편화되어 있었는데, 「영천청제비병진명」의 ‘장작(將作)’이나 ‘장상(將上)’의 명칭은 바로 이러한 관련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