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산성 ()

건축
유적
북한 황해남도 재령군 장수면 장수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시기에 포곡식으로 축조한 석축 성곽. 산성.북한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243호.
정의
북한 황해남도 재령군 장수면 장수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시기에 포곡식으로 축조한 석축 성곽. 산성.북한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243호.
개설

장수산성은 서쪽은 하니봉(710m)을, 동쪽은 동장대를 양쪽 끝으로 하고 크고 작은 봉우리와 능선을 연결하여 쌓은 포곡식산성으로 내성과 외성 및 이를 보강한 겹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적 변천

장수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고려와 조선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벽의 기초 부분과 성 내 중요 구조물의 터를 제외한 나머지는 상당 부분 개축되거나 변형되었다. 이 산성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한희(韓熙)의 지휘로 물리친 곳으로, 한희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이 봉우리를 한희봉이라 하였다.

내용

장수산은 옛날에는 치악산(雉岳山)이라고 하였으며, 황해의 금강(金剛)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였다. 장수산 동쪽 끝에 위치한 재령강은 산성의 동남쪽 구릉지대를 감싸 돌아 북쪽으로 흐르며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한다. 산성은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조사 하였다.

대형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의 두 기본성과 이 성들을 보강한 겹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석축 성벽 구간은 5,390m이고, 나머지는 험준한 자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양면 축조방법과 외면축조방법을 배합하여 쌓았다. 외성에 남문·북문·동문, 내성에 남문·북문·서문 등 모두 6개의 성문이 있으며, 현재는 내성의 남문터와 외성의 남문터 및 북문터가 남아 있다. 정문인 외성 남문은 반원형 옹성이고, 내성의 남문은 ‘ㄱ’자형 옹성구조이다. 문지 주변으로 고구려 기와편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 고구려 시기에 문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지와 연결되어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내성 남문과 외성 동문에는 각각 160m, 100m 길이의 성벽을 추가로 설치하여 겹성벽을 이루어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내성 남문 일대와 외성 동북 모서리 부근에는 주변 관찰이 용이한 곳에 성벽을 길게 내어쌓는 철성(凸城)을 축조하였다. 외성 내에서는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에 차단벽도 확인되고 있는데, 차단벽 양쪽으로는 작은 통로가 있어 출입을 통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현지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못은 외성에 4개, 내성에 5개, 우물은 내성과 외성에 각각 3개가 있었다. 큰 것은 사방 20m나 되는 방형의 못으로 지금도 물이 가득 고여 있다. 성 안에는 샘들도 많다. 성벽 곁에 성벽과 성 안팎을 감시하는 데 이용된 보초소[망대] 시설이 있다. 지금은 외성 남문에서 동북쪽으로 약 800m 떨어진 외성 동벽 곁에 있는 것만 남아 있다. 또한 성벽 부근의 높은 고지에는 6개의 장대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니봉의 서장대와 동장대가 전망이 좋아 산성 안팎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성내에 네 개의 무기창고를 비롯한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재 80여 기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일부 건물지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붉은 기와들이 확인되고 있다. 외성 내에 있는 1호 건물지는 초석 기와 건물지로 회랑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붉은색 기와와 함께 ‘侯夭(후요)’, ‘口溒三王(원삼왕)口...’라는 명문이 찍힌 회색 전돌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철을 제련하던 6기의 제철지가 발굴되었다. 제철지에는 평면형태 말각장방형 또는 원형의 노시설이 잘 남아 있다.

특징

산성 남쪽의 아양리와 월당리 일대에서는 평지성(아양리토성, 도마동토성)과 함께 석축벽을 비롯한 도시구획선과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는데, 아양리 평지성 내 붉은색 기와퇴적층에서는 313년으로 추정되는 ‘永嘉七年(영가칠년)’명 전돌과 파상문이 새겨진 토기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해당 전돌은 장수산성 내 1호 건물지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재질의 것으로, 이를 근거로 장수산성을 4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산성 주변인 아양리유적과 월당리 유적에는 평천정과 고임천정의 구조를 갖춘 고구려 시기의 석실봉토분 1,00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장수산성의 규모와 그 일대에서 확인되는 대규모 도시 유적으로 인해 장수산성을 고구려 후기 3대 도읍인 ‘한성’으로, 장수산성 아래 아양리·월당리의 토성 및 도시유적을 4~5세기의 '남평양(南平壤)'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장수산성 주변에는 규모가 있는 고구려 산성들이 적지 않게 배치되어 있어 이러한 황해도 일대의 산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부수도인 장수산성을 둘러싼 위성방어체계로 파악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황해도 지역 고구려 산성』(동북아역사재단, 2015)
『북한의 문화유적 순례』(양태진, 백산출판사, 1995)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관방체계와 남부전선의 변화」(신광철, 『선사와 고대』 35, 2011)
「고구려의 성곽」(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조선고고학전서』 27, 진인진, 2009)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최종택, 『백제연구』 47, 2007)
「고구려남부 부수도의 위성방어체계」(최승택, 『조선고고연구』 200-4, 2000)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최승택, 『조선고고연구』 1991-3, 1991)
「장수산성 1호건물터에 대하여」(최승택, 『조선고고연구』 1991-4, 1991)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www.cybernk.net)
집필자
정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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