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산성은 구월산[해발 954m]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고구려 때 축성한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벽을 쌓은 산릉선과 봉우리들은 절벽이거나 급한 경사로 인하여 지세가 험하며, 남북은 높고 길며 동서쪽은 짧고 중간 부분은 낮은 배모양 형태를 띠고 있다.
1980년대 중반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성벽의 구조와 축조방법 그리고 발굴된 유물들과 문화층 관계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 초축되어 고려 및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축조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가 남방진출을 적극화하던 4세기 중엽이나 이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고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을 고려한 5세기 초나 중엽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성이 있는 구월산에는 예로부터 단군과 관련한 수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삼성사, 단군대 등 단군과 관련된 유적들이 여러 군데 널려 있다. 6·25전쟁 때에는 이곳의 험한 지형을 이용한 반공유격대의 활동이 있었다.
구월산성은 구월산의 주봉인 사황봉(954m)을 중심으로 그 좌우의 산릉선과 이에 잇닿은 여러 봉우리들을 연결하여 축조되었다. 지형은 성 서쪽의 양편이 깎아 세운 듯이 우뚝 솟아 마치 문의 모양 같은 산이 있고, 여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서쪽 수구문 밖으로 흘러나가서 폭포가 되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성벽 전체 둘레는 5,230m이며 동쪽 성벽이 1,780m, 서쪽 성벽이 1,500m, 북쪽 성벽이 1,100m, 남쪽 성벽은 850m이다. 성벽은 협축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편축식도 적용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낮은 곳은 약 350㎝, 높은 곳은 약 520㎝이다.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세 곳이 있는데, 서문으로는 은율, 동문으로는 안악으로 통한다. 성문터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무늬와 색깔이 있는 기와들이 드러났는데 아마도 문루나 주변에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쪽 성벽과 남쪽 성벽이 합쳐지는 산능선에는 너비 2.5m, 길이 19m 치성이 남아 있는데 크기가 다른 산성의 것보다 크다. 성벽 위에는 성가퀴와 사혈이 있는데 사혈은 120㎝ 간격을 두고 있다.
장대터는 북쪽성벽의 사왕봉과 남쪽성벽의 봉우리, 성의 중간 언덕 등 여러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 안에는 우물이 4개가 있었고, 시냇물이 두 줄기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물원천이 풍부해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산성 안에서 발굴된 유물은 고구려의 적색승문기와를 비롯한 고려-조선시대 기와편과 질그릇들이 대다수이고 그밖에 활촉, 쇠못, 벼루 등이다.
현재 성은 거의 허물어졌으나 별장청(別將廳) 등의 건물지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안에 좌 · 우군창(左右軍倉)이 있었는데, 좌창은 문화 · 신천 · 안악에 속하였고, 우창은 은율 · 풍천 · 송화 · 장연(長淵) · 장련(長連)에 속하였다. 수성장(守城將)은 은율현감이 겸임하고, 별장 1인을 두었다.
구월산성의 성벽은 기초를 다지고 , 그 위에 앞면이 장방형인 4각추모양으로 다듬은 성돌을 계단식으로 몇 개 단을 쌓아올리다가 그 윗부분부터는 수직으로 쌓았다. 그리고 성벽 안은 막돌과 진흙을 섞어 다지면서 기본성돌과 맞물려 쌓았다. 이것은 고구려성으로 밝혀진 집안의 통구성, 평양성의 을밀대 축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축조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