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막루는 부여의 유민들이 세운 국가로 5세기에서 8세기까지 약 300년 동안 존속하였다. 두막루의 명칭에 대해서는 ‘구토회복(舊土回復)’을 의미하는 다물(多勿)과 같은 어휘로서 “부여인들이 잃어버린 옛 땅을 다시 수복(收復)한 나라"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위서』와 『북사』에 기록된 두막루의 자연·인문 환경과 구체적인 사회상은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부여 관련 사료에 기술된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두막루는 주변의 물길이나 실위(室韋)와는 다르게 농경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산과 구릉 및 넓은 못이 많으며 동이지역 가운데 가장 평탄하다. 땅은 오곡(五穀)에 알맞으며 오과(五果)는 생산하지 못하였다.
『신당서』 「유귀전(流鬼傳)」에 따르면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한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주했다.”고 하였다. 두막루의 존재는 『위서』 「물길전」에서 486년에 물길의 후니지(侯尼支)가 북위에 사신으로 가면서 그 주변국들의 사정을 기록한 글에 처음 언급되었다. 두막루는 『책부원귀』에서 724년 당에 내조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
두막루의 멸망에 대해 726년까지 제1송화강 유역에서 북진정책을 추진하던 발해와 흑수말갈의 치열한 대치상황에서 두막루국이 세력을 잃고 두 나라에 점령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막루가 중국 사서에 486년에 등장하는 것에 비해 부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494년(문자명왕 3)에 “부여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부여 멸망 이전 두막루의 존재로 인해 두막루의 계통에 대해서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의 고대국가로 인정하는 학설과 부여와 관련이 없는 국가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먼저 두막루를 부여와 별개의 국가로 파악하는 견해는 고구려의 세력 확대에 따른 두막루인의 인식이 그들 스스로를 북부여의 후예라고 자칭하게 한 것으로 보고, 구체적으로는 실위와 같은 몽골계 종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두막루를 북부여의 후예로 보는 견해는 우선 그 건국 시점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두막루를 부여의 후국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부여의 멸망 이후로 보기도 하고, 부여의 멸망을 광개토왕대인 410년의 동부여 멸망 이후 북으로 옮겨간 시기로 보기도 한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두막루와 부여를 동시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 중국 학자들은 대체로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로 보며,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에 공파(攻破)된 동부여의 유민이 북상하여 건국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두막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신당서』의 기록에 나오는 나하와 흑수(黑水)를 어디로 비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흑수는 흑룡강으로 보고 이곳으로 유입되는 하천인 동쪽으로 흐르는 제1송화강을 나하로 비정해, 두 강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중국 북동부의 흑룡강성 동북쪽 끝의 삼강평원(三江平原)의 곤토령(滾兎嶺)문화·봉림(鳳林)문화의 고고학적 문화 계통을 물길로 보는 견해와 더불어 두막루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 문화층을 3단계로 나누어 전기단계인 곤토령문화시기(서기전 2세기서기 2세기), 발전기인 봉림문화시기(서기전 25세기), 그리고 말갈계문화로 전환되는 물길-두막루단계(서기 6~7세기)로 세분화 하고 있다. 두막루로 보는 견해는 이 지역의 토기, 주거지, 온돌, 성지 규모의 차이 등으로 볼 때 기존의 말갈계통의 고고학적 문화와는 차별화된 옥저계로 보고 이를 두막루 문화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