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樗 : 가죽나무)와 포(蒲 : 부들)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든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오잡조(五雜組)』 권6에 저포는 삼대(夏 · 殷 · 周)에도 있었다 하고,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26에 저포는 노자가 서융(西戎)에 가서 만든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아주 오래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당국사보(唐國史補)』에 이 놀이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놀이판은 360자(子)로 되어 있으며, 말[馬]은 놀이하는 사람마다 여섯 개씩 갖는다.
주사위는 위는 검고 아래는 흰데, 다섯(五木)개를 던져 그 사위를 본다. 그 중에서 다섯 개가 모두 검게 나오는 노(盧)가 가장 좋으며, 그 다음으로 치(雉) · 독(犢) · 백(白)이 좋다. 이러한 좋은 사위(貴采)가 나오면 주사위를 계속하여 던질 수 있으며, 남의 말을 잡거나 관문(關門)을 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개(開) · 새(塞) · 탑(塔) · 독(禿) · 궐(撅) · 효(梟)와 같은 나쁜 사위(雜木)가 나오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저포경구화(樗蒲經舊畫)』라는 책에 의하면 원래는 주사위가 네(四木)개였다고 한다. 이 놀이는 중국에서 도박의 하나로 성행함으로써 ‘도박희(賭博戱)’ 또는 ‘박희(博戱)’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놀이가 우리 나라에 언제 들어와서 언제까지 행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놀이방법이 우리 나라의 윷놀이 노는 방법과 비슷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윷놀이를 나타내는 이름인 유(杻 · 忸 · 流 · 由), 윷[遊齒] · 사희(柶戱) 등과 저포(摴蒲, 樗蒲)가 혼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말 이색(李穡)의 『목은집시고(牧隱集詩藁)』 권35에 있는 「저포시(摴蒲詩)」는 윷놀이를 읊은 것이요, 16세기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에서도 저포를 ‘ᅀᅲᆺ’으로 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경상북도 안동지방에서 정초에 윷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이름도 ‘저포송(摴蒲頌)’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사(北史)』 동이전(東夷傳) 백제국지부(百濟國之部)에 백제에서 저포를 놀았다고 한 기록도 중국식 저포를 일컬은 것인지, 윷놀이를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15세기에 김시습(金時習)이 쓴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에서 양생(梁生)이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였다는 것도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저포가 우리 나라에서 실제로 얼마나 오랫동안 행해졌는가는 알 수 없다. 다만, 윷놀이 노는 방법이 저포놀이방법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그 영향관계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