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절령(岊嶺, 자비령) 이남의 봉주(鳳州)와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를 연결하는 역로망이다.
『고려사』 권82 병지2 참역(站驛)에, “절령도(岊嶺道)는 11개의 역을 관할한다. 절령(岊嶺)[봉주(황해북도 봉산군)], 동선(洞仙)·단림(丹林)[황주(黃州, 황해북도 황주군)], 도공(陶工)[봉주], 금동(金洞)[안주(安州, 황해남도 재령군)], 사암(射嵒)[수안(遂安, 황해북도 수안군)], 회교(迴郊)·생양(生陽)·고원(高原)·신지(神地)·운봉(雲峯)[서경(西京, 평양특별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령도라는 역도 명칭이 『고려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절령역의 역명에서 유래한 만큼, 절령역은 이 역도에 속한 11개 역 중에서 상징성이 있는 역으로 절령 고개 아래에 위치하여 서북방 간선 역로의 관문(關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절령도와 같이 대표 역 이름을 붙인 역도들은 대개 궁예(弓裔)가 철원·송악을 중심에 두고 확보한 후고구려(後高句麗) 영역 내에 분포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따라서 이들 역도는 주요 교통로 구간으로 인식되어 역의 설치와 역로의 정비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들 역도의 분포 영역은 교통 중심지대인 개경을 중심으로 ‘X’자형의 간선 교통로를 형성하면서 교통 거점 상호간을 연결하였다. 절령도는 고려시대 개경-서경-안북대도호부 영주(寧州)-의주로 연결되는 서북계(西北界)의 간선 역로상에서 멸악산맥의 고개인 절령을 넘어 서경에 이르는 구간에 해당한다.
절영도의 역 대부분은 서북계의 간선 역로상에 위치하였는데, 절령 이남에 위치한 절령역과 동선역에서 절령을 넘어 황주목의 단림역을 경유하여 서경 관내에 도달하였다. 서경은 절령도의 11개 역 중 5개가 위치한 만큼 절령도뿐만 아니라 흥교도(興郊道)·운중도(雲中道)의 역 4곳이 위치하는 서북방 간선 역로상의 중요한 교통 요충지였다. 또한 자비령(慈悲嶺)으로도 불린 절령(489m)도 고대(古代)로부터 전통적인 정치·군사상의 요충지였다. 북계 영역을 잇는 흥교도와 운중도의 역로가 미치는 서경에서 절령도의 생양역-단림역·동선역을 경유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쉬었다가 자비령을 넘었으며, 그 아래의 자비령원(慈悲嶺院)을 거쳐서 절령역에 이르렀다.
이처럼 자비령은 험한 고갯길이었기에 미륵원이나 자비령원과 같은 원 시설이 운영되었다. 절령역에서는 남하하여 용천역(龍泉驛, 동주)에서 시작하는 금교도(金郊道) 관할의 역로를 따라 개경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간선(幹線) 역로 이외에도 황주 관내의 수안현과 안주 방면으로 향하는 지선(支線) 역로도 뻗어 있었다.
고려시대 절령도는 절령 고개를 넘어 서경 관내로 진입하는 역도망이다. 이 역도는 개성부 관내에서 시작하는 금교도와 서경에서 시작하는 흥교도·운중도를 이어주는 서북계 간선 역로의 중심에 해당한다. 그 간선로의 일부인 절령도의 역로상에 절령이라는 험조처(險阻處)가 자리하였다. 이곳에서는 서북계의 원활한 교통운송활동을 위해 자비령원과 같은 원 시설의 설치 등 여러 노력이 시도되었다. 향후에는 대체 경로 개발 등의 교통정책이나 해당 지역의 역사지리에 관한 고찰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