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군역(軍役) 보포화(保布化) 과정은 이미 중종 이전부터 시작되어, 신역(身役) 대신 포(布)를 받는 것이 보편화되어갔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오면서 양역인구의 면역·투속(投屬)·가탁(假託)이 날로 증가하여 군포의 국고수입이 날로 줄어들자, 국가에서는 양정(良丁) 파악을 철저히 하여 정해진 군액(軍額)의 확보에 노력하였다.
또한, 각종 전염병, 흉년, 군량의 부족 등을 이유로 상번군(上番軍)을 정번(停番)시키고 그 대신 포를 상납하게 하여 재정궁핍을 막아보고자 하였는데, 이를 정번수포법이라고 한다.
그 확실한 시행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군비감축으로 재정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한 현종 초기로 볼 수 있으며, 1662년(현종 3)의 농기정번(農期停番)을 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뒤에도 계속 양역변통에 대한 노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