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전(政法典)에 속하였다. 정법전은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무관조에 “정관(政官)[혹은 정법전이라고 이른다] 처음에 대사(大舍) 1인, 사(史) 2인으로써 사(司)를 삼았다.원성왕 원년(785)에 이르러 비로소 승관을 두어 승려들 가운데 재행(才行)이 있는 자로써 충당하였다. 유고가 있으면 교체하고 정해진 연한은 없다. 국통(國統) 1인[또는 사주(寺主)라고 이른다]”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에도 “원성왕 원년(785)에 이르러 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이라 이름하고, 대사 1인과 사 2인으로써 유사를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 사서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 보이지 않는 정관의 명칭이 『삼국사기』에서는 정법전의 별칭이라 했고,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 원년에 승관을 새로 설치했다고 한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또 승관을 두어 정법전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무관조에 실린 정관 관계 기사는 정법전과 국통 이하의 중앙승관, 주통○군통 등의 지방승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정관이란 정법전을 비롯해 국통 이하의 중앙승관 및 주통○군통 등의 지방승관을 총괄하는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법전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보이듯이 원성왕 원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그 이전에 속관만의 유사로 운영되던 것이 승관으로 구성원이 바뀌면서 정식관사로 출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법화상은 각종 금석문에 정법대덕, 정법승, 정법화상 등으로 나오는데, 이들은 불사의 조영이나, 국왕의 측근에서 사찰의 토지 및 불교계와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였다. 정법전의 역할은 원성왕 원년 이전에는 단순히 대사와 사의 ○유사○들이 맡았을 것이나, 정법전의 설치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정법화상 또는 정법대덕 등에게 위임되었을 것이다.
정법화상의 변화상은 불교계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보다는 승려들에 의한 자율적인 면을 국가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법전의 승관은 지방승관인 군통보다 상위직으로서 불사의 수조관으로 참여하거나, 사원에 기진되는 토지에 대한 문제를 심의해 군통으로 하여금 사원의 토지를 구획하도록 하는 지위에 있었다.
또한 중앙승관인 대통을 겸할 수도 있었지만,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의 도감전의 체계 ‘전국통승-전대통정법화상대덕○대통 승○정법화상 승…”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지위가 대통보다는 낮았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