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4년( 명종 24) 아버지가 반역한다는 대정(隊正) 이금대(李金大)의 무고로 형 정윤당(鄭允當)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1204년( 신종 7)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승도(僧徒) 등이 최충헌(崔忠獻)을 암살하려고 하자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가 이를 구원하였다. 1206년( 희종 2) 좌승선(左承宣)으로 있을 때, 왕이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 정숙첨을 금사(金使)에게 보내 행례소(行禮所) 문제를 상의하였다. 1215년( 고종 2) 형 정진(鄭稹)과 함께 반역을 도모한다는 예부원외랑 윤세유(尹世儒)의 모함을 받았으나 무고임이 밝혀졌다.
이듬해 거란유종(契丹遺種)의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어 부원수 조충(趙冲)과 함께 염주(鹽州: 황해도 연안) · 배주(白州: 황해도 배천)의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흥의(興義) · 금교역(金郊驛) 사이에 진을 쳤다가 군중(軍中)이 놀라 달아나자 다시 국청사(國淸寺)로 옮겼다.
1217년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원수직에서 파면되고 하동에 유배되었다. 이는 정숙첨이 군중에서 최충헌이 왕실을 쇠잔하게 하고 적을 불러들였다고 비방한 것에서 빌미가 된 것인데, 이로 인해 최충헌이 죽이려 하였으나 최우가 힘써 구해주었다. 최충헌이 사망한 후 최우가 집권하여 최충헌의 실정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최충헌세력을 제거할 때에도 정숙첨은 살아 남았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밖에 정숙첨은 원수가 된 뒤로 군사들로부터 뇌물을 많이 받아 재산을 축적하여 군사들의 불평이 잦았다. 뒤에 평장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