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현숙(顯叔). 증조는 국자박사(國子博士) 정승방(鄭丞邦)이고, 조부는 국자진사(國子進士) 정방주(鄭邦柱)이며, 아버지는 국자진사 정공연(鄭公衍)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임되었고, 이어 지영주(知榮州)가 되어 일을 보려 할 때 주리(州吏)가 고사(故事)를 들어 소재도(消灾圖)에 분향하기를 청하므로 “인신(人臣)의 법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철거하였다.
또한, 영주에 무신(無信)이라는 탑이 있었는데, 이를 허물고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수리하여 신돈(辛旽)의 노여움을 사서 계림옥(鷄林獄)에 갇혔다. 신돈이 정습인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정신하들의 도움으로 죽임을 면하고 평민이 되어 영주에 가서 그 탑을 다시 쌓게 하였다.
신돈이 죽은 뒤에 기용되어 다시 지영주가 되고 또 지밀성(知密城)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방의 세력가를 누르고 음사(淫祀)를 금하였다. 우왕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일본 사신에 대한 답례사(答禮使)에 임명되었는데, 일본 사신이 불교를 배척하는 자라 하여 바꾸기를 청하므로 결국 가지 못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을 행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랐다.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으나 곧 윤구택(尹龜澤)의 고신(告身: 임명장)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