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들어와 역의 운영이 마비되자, 이를 복구하기 위해 1272년(원종 13) 각 동에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보낸 것에 유래하여, 역의 관리와 운영이 정역별감의 주요 임무라고 파악된다.
정역별감의 등장과 같은 변화는 고려 전기의 22역도(驛道)가 유지되기 힘든 상황에서 정역별감이 제찰사(提察使)의 지휘를 받게 하여 국가의 역로망 통제권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 준다.
고려 전기에 22역도가 운영되면서 그 역의 관리, 운영을 위해 관역사가 배치되었으나 점차 몽골의 침입 등으로 그 운영이 무너졌다.
이에 1272년 정월에 각 도에 나누어 정역소복별감을 보낸 바 있으며, 그러다가 1280년(충렬왕 6) 이영주(李英柱)가 정역별감을 지낸 기록에서 정역별감이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그 얼마 전에 상설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정역소복별감 또는 각역응방심검별감(各驛鷹坊審檢別監) 등의 이름으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되던 것에서 정기적인 명칭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389년(공양왕 1년) 12월 조준(趙浚) 등이 근래에 역호(驛戶)가 시들거나 폐지되어 말을 배치해 두고 체신을 전하고 길을 알고 가리켜 주는 역할을 주군(州郡)이 대신하게 되어 고통이 커서 유망하는 사례가 많음을 지적하면서 주군을 정상적으로 운영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을 구휼하여야 하는데 정역별감은 도당(都堂)이 보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업신여겨 역의 주1이 어려웠음을 지적하고는, 역마다 수령(守令)의 예와 같이 천거하여 5·6품의 역승(驛丞)을 두어 역호와 역마(驛馬)를 충실하게 하여 역제(驛制)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정역별감은 역승으로 대체되었다.
한편으로 기존의 관역사가 역승으로 바뀌었다는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의 기록을 근거로, 정역별감이 관역사와 공존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조선에 들어서 역승과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한때 함께 설치되기도 하였다. 정역찰방은 1402년(태종 2) 경기(京畿) 지방의 역로를 살피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