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익부(益夫).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온(鄭溫)이다.
일찍부터 병법을 익혔고, 1491년(성종 22) 변경을 시끄럽게 하는 야인을 토벌할 때 원수 허종(許琮)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에 보직되고 이어 사헌부감찰·군자시주부·사복시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 그 공으로 삼등공신인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에 녹훈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공신에게 특별히 품계를 주는 예에 따라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오르고, 간성군수에 임명되었으며, 4년 뒤 웅천부사로 옮겨 삼포왜란 이후의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썼다. 다시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북청에 성을 쌓아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518년(중종 13) 첨지중추부사로 전보되었다가 이듬해 가선(嘉善)으로 승진, 청계군(淸溪君)에 봉하여지고 특별히 회령부사에 제수되었다.
1522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기용됨에 병선과 무기를 수리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다가 명나라를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구를 격멸, 그 공로로 품계가 더하여지고 조정으로부터는 궁시(弓矢)와 의대(衣帶)가, 그리고 명나라로부터도 백금이 하사되었다.
이어 훈련원도정이 되었다가 152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사가 되고, 상호군을 거쳐 충청도병마사로 있을 때 무고로 인하여 횡성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죄가 풀려 부총관에 서용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삼척부사가 되었다.
청렴하며 장재(將材)로 손꼽혀 30여년간 남북 변경의 장수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