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집을 출간하기 위해 만든 판목은 본래 양주 석림사(石林寺)에 보관해 두었다. 그 뒤 저자의 아버지 박세당(朴世堂)의 문집인 『서계문집(西溪文集)』의 판목이 성주 쌍계사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그 근처에 작은 암자를 지어 옮겨 두었다. 그 뒤 저자의 6대손 박제억(朴齊億)이 수장되어 있던 목판을 다시 성주청암암(靑巖庵)으로 옮겼다.
때마침 그 지방으로 부임하여 온 수령이 그 곳을 유락지로 삼고 목판을 내다 땔나무로 쓰기도 하여, 절반 이상이 없어지고 부식되기도 하였다. 이에 박제억이 흩어진 장판(藏版)을 다시 수습해 암자에 보관하고, 훼손·유실된 것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본집·별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문을 보완·편집해 후집(後集)으로 만들어, 사촌 동생 박제륜(朴齊崙)과 협력하여 1892년(고종 29)에 출간하였다.
본집 9권, 별집 5권, 후집 6권, 합 20권 7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미국 클레어몬트대학 도서관(Claremont Colleges Library)·일본 동양문고·미국 UC버클리대학교 도서관(UC Berkeley Library) 등에 있다.
본집 권1에 장귀편(將歸篇) 등 27수의 오언고시, 한식조화자문(寒食朝和子聞) 등 12수의 칠언고시, 유수락산요(踰水落山腰) 등 28수의 오언율시, 칠언율시 등 96수, 권2에 오언절구 23수, 칠언절구 111수, 연구(聯句) 4수, 사부(詞賦) 5편, 전(箋) 6편, 장(狀) 4편, 잠명찬(箴銘贊) 6편, 권3에 제문 20편, 잡저 9편, 제발(題跋) 8편, 전(傳) 4편, 묘표 1편, 권4에 행장, 서(序) 8편, 기(記) 9편, 논 2편, 차(箚) 2편, 소(疏) 2편, 권6에 소, 권7에 소·계(啓)·의(議)·주(奏)·서(書), 권8·9에 간독(簡牘) 163편이 수록되어 있다.
별집 권1에 장첩(狀牒)·단송안(斷訟案), 권2에 증손투호의절(增損投壺儀節), 권3에 추우록(追尤錄), 권4에 감류편상(坎流編上), 권5에 감류편하 및 부록과 저자에 대한 행장 1편, 후집 권1에 사언고시·오언고시·칠언고시·오언율시·칠언율시·오언절구·칠언절구·칠언배율 등, 권2에 의(疑)·의(義)·책·잠·전(箋)·표·주(奏)·제문·기(記)·소(疏)·계(啓)·상언(上言) 등과 후집유보(後集遺補), 권3에 행장·묘표, 권4에 제문·애사, 권5 기사민절록상(己巳愍節錄上)에 진신소(縉紳疏)·금부문안(禁府文案)·소차, 권6 기사민절록하에 임종기언(臨終記言)·기문(記聞)·기사(記事)·시망(諡望)·사제문(賜祭文)·봉안문·선생사실기략(先生事實紀略), 박제억의 후집발(後集跋)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시·칠언시·고시·율시·절구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명쾌하기보다는 우수와 슬픈 감이 감돌아 작품만을 보고서는 젊은 사람의 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오언·칠언의 율시는 대체로 조촐하지만 우수와 비감을 느낄 수 있다.
전(傳) 가운데 「이생전(李生傳)」은 무식한 효자의 천성에서 우러난 효심을 기리는 글이고, 「반남선생가전(潘南先生家傳)」은 그의 먼 선조인 고려 시대의 박상충(朴尙衷)에 대한 전기를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권4의 「서김장군일사(書金將軍逸事)」는 그가 귀양살이하고 있을 때 당시 관련자들로부터 들은 일을 근거로 김응하(金應河)장군의 전쟁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김응하에 대한 불미한 전설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기 위한 심정에서 쓴 것이다.
서(序)·기(記) 등을 고찰해 보면 저자의 문장은 청년의 기개가 엿보이기는 하나 글의 구성과 논리가 매우 긴밀해 보인다. 소(疏) 가운데 「대유생성규헌(代儒生成揆憲)」은 인현왕후를 폐비할 때 『시경』의 글을 인용하여 이를 반대한 것이다. 저자는 이 상소문으로 인해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 심한 고문을 받아 귀양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별집 권4·5의 「감류편」은 조정에 있을 때의 활동을 시차별로 기록한 것으로, 이단하(李端夏) 등을 탄핵한 경위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사민절록」은 기사년에 폐비를 반대하는 소문과 관련해 박태보가 가혹한 형벌을 받고 죽음에 이른 경위를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