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효백(孝伯). 병조판서 조흡(曺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조굉중(曺閎中)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학문이 정미(精微)하고 언행이 독실하여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종질 조엽(曺熀)과 읍 사람 최명해(崔鳴海)·임시태(林時泰) 등과 더불어 창의하여 격문을 사방에 돌려 군량(軍粮)을 모집하였다.
한림 양만용(梁曼容), 옥과현감 이흥발(李興浡) 형제, 순창군수 최온(崔薀) 등과 더불어 여산군(礪山郡)에 모여 남한산성을 향하던 중, 청주에서 적과 화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려(軍旅)를 해산하였다.
그 뒤 참판 김반(金槃)이 이를 듣고 천거,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일에 뜻을 끊고 일생을 마쳤다. 도내의 사림들이 건의하여 산산(蒜山)의 역정사우(櫟亭祠宇)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