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궁내부협판, 평식원총재,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한 관료.
이칭
미경(米卿)
월파거사(月坡居士)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사망 연도
1926년
본관
풍양(豊壤)
정의
대한제국기 궁내부협판, 평식원총재,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한 관료.
개설

본관은 풍양(豐壤). 초명은 조석구(趙晳九). 자는 미경(米卿), 호는 월파거사(月坡居士). 판서 조봉하(趙鳳夏)의 손자로, 조동석(趙東奭)의 아들이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사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승지·부제학·대사성·이조참의·규장각직제학·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뒤 궁내부협판·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 등 주로 궁내부의 요직을 지내며 왕실의 의례를 담당하였다.

그밖에 평식원총재(平式院總裁)·의정부찬정·판돈녕부사·기로소비서장(耆老所秘書長) 등도 역임하였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때 전 의정부찬정이라는 명의로 일본정부가 주는 은사금(恩賜金) 및 남작의 칭호를 거절하고 합방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었다. 병합에 항의하여 두 차례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들이 구원하여 실패에 그쳤다.

그 뒤 양주 사릉리(思陵里)에서 미망인이라 자처하고 은둔하였다. 1917년 스스로 월파거사라 칭하며 금강산 반야암(般若菴)에 은거 중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상경하여 인산(因山)을 치르고 중국 허난성[河南省]으로 망명하였다. 7년 동안의 유랑 도중 둘째 아들 조남익(趙南益)의 사망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봉선사(奉先寺)에서 기거하다가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기려수필(騎驢隨筆)』
『朝鮮統治史論稿』(田保橋潔, 成進文化社, 1972)
집필자
이상태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