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문(應文), 호는 해산(海山). 경상북도 영양 출생. 인석(寅錫)의 둘째아들이다.
어릴 때 의병대장이던 할아버지 승기(承基)와 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과 한학을 익히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닌 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에 재학중인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동경(東京)지회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귀국하여 1929년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에는 한의학연구에 몰두하여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하였다. 이때의 연구로 근대한의학을 개척하여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1930년대 『신동아 新東亞』에 한의학의 학술논문을 연재하여 1934년부터는 『한의학원론』(漢醫學原論)에 이어 『폐병치료법』·『신경쇠약치료법』·『위장병치료법』·『부인병치료법』 등을 간행하였다. 1935년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36년 인사동에 일월서방(日月書房)을 설립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8월 18일 원세훈(元世勳) 등과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였는데 홍명희(洪命憙) 계열에 속하였다. 조선민족당이 그 해 9월 4일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한 뒤 지방부장에 이어 조직부장으로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한국 민주당을 탈당하였다.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강력히 추진하였고, 이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한 성향이 한민당을 탈당한 이유일 것이다. 1950년 5·30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김동성(金東成)과 함께 중도 성향의 무소속구락부를 이끌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는 주로 한의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업적을 쌓았으며,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과 1980년 7월 서기장을 맡았다. 1988년 5월 23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