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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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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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종교나 종파의 신도들이 모이거나 또는 특정의 숭배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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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특정 종교나 종파의 신도들이 모이거나 또는 특정의 숭배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
개설

종교 취락은 사찰이나 교회 등의 종교시설을 중심으로 발달한 취락이며, 신자나 참배객을 위한 상점·여관·음식점·토산품점 등의 서비스업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 단체에서 경영하는 교육·문화·스포츠·후생 복리 시설 등이 발달되어 규모가 큰 도시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명 사찰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여 관광지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특정 종교나 종파를 중심으로 종교 취락이 형성되었다.

내용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 취락은 충청남도 계룡산의 신도안(新都內)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의 정감록촌(鄭鑑錄村), 경기도 부천시의 박장로 신앙촌(朴長老信仰村), 전라북도 김제시의 증산교촌(甑山敎村),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도인촌(靑鶴洞道人村), 부산광역시 감천동의 태극도(太極道) 도인촌 등이 있다.

신도안은 계룡산 남쪽 기슭의 충청남도 논산시 신도안면에 자리하며, 풍수지리상의 길지로 꼽혀 조선 초기에 도읍지로 물망에 올랐었다. 신도안의 북쪽은 계룡산을 등지고 있고, 동쪽·서쪽은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부는 넓고 평평하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회룡고조(回龍顧祖) 또는 산대극형(山大極形)에 속하는 길지이다. 조선 왕조가 망한 뒤 정씨(鄭氏)가 신도안에 왕국을 건설한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믿는 사람들이 3·1운동 이후에 이곳으로 모여들어, 1924년 신도안에 거주한 호수는 898호, 인구는 4,565명에 달하였다.

천도교는 1925년에 처음 들어왔으며, 8·15광복과 6·25동란기에 유사 종교를 믿는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어 휴전 직후의 종파수는 50여 개에 달하였다. 1976년 조사에 의하면, 유사종교는 불교계 56종, 무속계 17종, 동학계 6종, 유교계 4종, 기독교계 2종 등 85종이었고, 정통 종교 단체는 불교 3개, 동학 3개, 기독교 2개 등 8개로 모두 93개의 단체였다.

1968년 계룡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공원 내의 모든 사이비 암자와 기도원·교당 등이 철거되었으며, 1979년에 종교 단체가 정리되면서 그 수가 크게 감소되었다. 1984년에 교주와 주민들이 모두 쫓겨났고, 그 자리에는 3군 본부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계룡대가 들어섰다.

정감록촌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유포된 풍수지리적 예언서인 『정감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취락이다. 이곳은 경상북도의 최북단 소백산맥의 남쪽 산간분지에 위치한 풍기읍의 금계를 중심으로 욱금리·삼가리에 걸쳐 발달한 취락이다. 금계리는 해발 250m 내외에 위치하나, 다른 2개리는 300∼700m 지점에 산재한다.

『정감록』에는 머지않아 조선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하였으며, 다가오는 대재란에 대한 피난처로서 풍기·차암(車巖)·금계촌을 위시한 10승지(十勝地)를 거론하였다. 10승지는 모두 강원도 영월 이남에 치우쳐 있으며, 교통이 불편한 내륙 오지이다.이는 『정감록』에서 “열 곳에는 흉년이 안 들고 병화가 침입하지 않는다〔此十處凶年不入 兵火不入〕.”와 부합되는 위치이다.

조선 후기 사회적 혼란기에 『정감록』의 신봉자들이 전국에서 10승지로 모여들었다.정감록촌이 이 지역에 형성된 것은 『정감록』에서 “그 첫째가 풍기이다.”라는 글귀를 그대로 신봉하여 이주해온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1910년 이전에는 9.9%, 일제강점기에는 19.2%, 광복 후에는 70.9%의 주민이 전입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전입한 주요 시기는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을 중심으로 한 1920년대, 만주사변·중일전쟁을 중심으로 한 1930년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한 1940년대 등으로 사회적 혼란기와 일치한다. 1959년 당시에 풍기읍 가구주의 출신지별 비율은 영주시 46.9%, 그 외에 기타 지역 22.9% 등으로, 경상북도가 전체의 70%에 달하였다. 타도 출신으로는 평안북도 8.1%, 충청북도 6.1%, 강원도 5.4%, 평안남도 4.8%, 황해도 2.8% 등의 순이며, 북한 출신이 16.6%를 차지하였다.

이곳의 주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하여 해발 900m 내외의 산지에 화전을 개간하여 감자·조·수수·옥수수를 재배하였고, 소백산의 산채·약초·송이버섯을 채취하였다. 이후 과수 재배(1920년대)·인조견 공업(1930년대)·인삼 재배(1980년대)의 산업을 일으켜 산업 구조와 경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때 각자 생산하는 산업에 따라 가옥을 건축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취락은 산촌(散村)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중앙선의 개통과 교통의 발달로 읍 중심지의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정감록 신봉자들은 소백산 중턱이나 내륙의 오지로 이주하였다.

박장로 신앙촌은 옛 경인가도를 따라 부천시의 범박동·괴안동·소사동 일부와 시흥시의 소래 일대 할미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본래의 명칭은 ‘한국예수교 부흥협회’인데, 1959년 11월부터 총 43만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300여 동의 주택과 50여 동의 공장 및 각종 공공시설·학교 등을 건립하여 신앙촌을 건설하였다.

미륵 신앙을 골자로 하는 증산교촌은 동학혁명 이후 증산교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믿는 신도들이 이룩한 취락으로서,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주변의 동곡리·금산리·청도리·쌍룡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강일순(姜一淳)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한 곳으로, 모악산의 금산사 계곡의 금평저수지(金坪貯水地) 상류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모악산은 풍수지리상 음산에 속한다. 그래서 ‘선천 세계는 양이 지배하는 반면 후천 세계는 음의 세계이므로, 음의 표상인 모악산은 미래불(未來佛)의 강림을 기다리는 장소’라고 한다. 주민들은 한때 모악산의 산간 지대에서 화전을 일구면서 은둔생활을 하였었다. 이곳에는 증산의 영정을 모신 청도 대향원과 오리알터의 증산 법종 본부 및 증산교 본부가 있다. 그 외에 후천개벽 시 증산이 재현한다는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이 유명하다.

증산교의 분파인 태극도는 본래 전라북도 정읍에서 만들어졌다. 이후 태극도는 전국적인 활동과 함께 함경남도와 북만주에서 벌채사업, 안면도·원산도 등지에서 염전 사업과 간척 사업 등을 실시함으로써 수입과 교세를 확장시켰다. 광복 이후인 1948년에는 부산광역시의 보수동에 본부를 두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에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본부 주변으로 판자촌을 형성하게 되자,정부는 현재의 감천동으로 이주시켰다.

옥녀봉과 천마산 산록까지 형성된 태극도 도인촌은 단일 종교 취락으로는 가장 방대한 곳이다. 지금도 ‘감천 도장’이라는 태극도의 성지가 있는데, 이 마을을 한때 ‘태극도 마을’이라고도 불렸으며, 최근에는 ‘문화 마을’로 그 명칭을 변경시켰다.

참고문헌

『한국지리』(권혁재, 법문사, 2005)
『촌락지리학』(홍경희, 법문사, 1985)
『한국지지 -지방편 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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