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서자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정4품 동궁 관직.
이칭
이칭
태자좌서자
제도/관직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말기
소속
태자궁|동궁
내용 요약

좌서자는 고려시대에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정4품 동궁 관직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자를 책봉한 뒤에 동궁 관직을 두어 보좌하도록 하였는데, 좌서자는 우서자와 더불어 태자가 주관하는 의례를 돕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태자좌서자는 겸직으로 제수되었으며, 그에 대한 댓가로 문종록제에서 16석 10두, 인종록제에서 16석의 녹봉을 받았다. 원간섭기 이후 좌서자는 좌서윤으로 바뀌었으며, 뒤에 익선으로 고치면서 좌우의 구분을 없앴다.

정의
고려시대,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정4품 동궁 관직.
설치 목적

동궁 관직의 하나로, 태자가 참여하는 의례 진행을 돕는 등의 일을 맡기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임무와 직능

좌서자는 태자를 보좌하는 관원으로 겸직이었다. 태자가 주관하는 국가 의례에 참여하여 주1를 인도하는 일’ 또는 ‘황태자가 해야 할 것을 호령하는 일’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변천 사항

좌서자는 고려시대 태자를 주2하는 정4품 동궁 관직이며, 정식 명칭은 주3이다. 『 고려사』 백관지(百官志) 동궁관조에는 1022년(현종 13)에 태자를 세우고 삼사 · 삼소와 사의랑(司議郞) 등을 두었으며, 비로소 1066년(문종 20)에 좌우서자 각 1명씩 두고 정4품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998년(목종 1)에 제8과에 좌우서자가 포함되었고, 1026년 11월에 최제안(崔齊顔)이 태자우서자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성종 대 동궁관제가 정해지고 좌서자를 두었다고 생각된다. 태자서자는 당나라에서 황태자를 시종하고 의례를 돕는 임무를 하였는데, 고려의 서자도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056년(문종 10)에 왕태자가 태묘를 주4할 때 서자 2명이 좌우찬자로 참여하였다.

아울러 『고려사』 「예지(禮志)」에는 왕태자 책봉 의례, 왕태자가 칭명(稱名)하고 입부(立府)하는 의례, 왕태자 관례 의례, 왕태자 납비 의례, 왕태자 원정(元正) · 동지(冬至)에 여러 신하에게 하례를 받는 의례〔受群官賀儀〕 등 태자와 관련된 여러 의례에 서자가 참여하여 ‘왕태자를 인도하는 일’, ‘왕태자가 해야 할 것을 호령하는 일’, ‘책함 · 탁자 · 인장 등을 태자에게 전달하는 일’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국왕의 아들을 태자로 주5하는 일은 여러 왕대에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동궁관직은 정제의 하나로 포함시켰지만, 한편으로 언제나 태자가 책봉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관직을 겸직으로 설정하였다. 좌서자는 보통 시랑 이상의 관인에게 겸직으로 제수되었고, 문종록제에서 16석 10두, 인종록제에서 16석의 녹봉이 정해졌으며, 좌서자 직의 수행에 대해 해당 녹봉액만큼 더 받았다.

원간섭기 이후 좌서자는 1277년(충렬왕 3)에 주6으로 바뀌었고, 1308년에 정5품 익선(翊善)으로 고친 뒤 그 직에 1명을 두어 좌우의 구분을 없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10)

논문

김선미, 「고려 문종대 왕태자 책봉과 태자 관련 제도 정비의 의미」(『역사민속학』 45,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김창겸, 「고려 현종대 동궁관 설치」(『한국사학보』 33, 고려사학회, 2008)
이진한, 홍원표, 「고려시대 동궁 4품 이하 관직의 제수와 녹봉」(『한경대논문집』 32, 2000)
주석
주1

황제국에서, 황제의 자리를 이을 황제의 아들.    우리말샘

주2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이끌어 감.    우리말샘

주3

고려 시대에, 동궁에 속한 정사품 벼슬. 문종 22년(1068)에 정한 것으로, 빈객(賓客)의 아래이다.    우리말샘

주4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을 찾아가 뵘.    우리말샘

주5

왕세자, 왕세손, 왕후, 비(妃), 빈(嬪), 부마 등을 봉작(封爵)하던 일.    우리말샘

주6

고려 시대에, 세자첨사부에 속한 벼슬. 충렬왕 3년(1277)에 두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진한(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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