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도 하나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라 이(理)와 기(氣)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작용하는 것은 기뿐이라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 내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황(李滉)의 학설을 계승해 이와 기를 분리하고 이의 우위를 주장한 주리파(主理派)와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주기(主氣)라는 용어는 이황이 기대승(奇大升)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을 벌이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인데, 현상윤(玄相允)의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후기의 성리학을 주리파·주기파·절충파(折衷派)로 분류한 이래, 일반적으로 이기론에서 이와 기를 일원론적으로 파악하고 기의 작용을 강조하는 학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기의 작용을 강조한다고 해서 모두 주기파는 아니며, 절충파와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많아서 한 인물에 대해 학자에 따라 다르게 구분하기도 한다.
주기파의 형성은 이이가 성혼(成渾)과 ‘사단칠정’에 관해 토론하면서, 이황의 이와 기가 서로 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특히 이가 작용한다고 한 부분을 공격하고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 데에 그 시원이 있다.
사실 이이의 견해는 이와 기가 실제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해 주리론과는 구분되지만,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해 이를 보편적 근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주기론적 견지와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이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 속에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의 견해를 계승하면서 점차 이에 비해 기의 작용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됨으로 인해 주기파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후 주기파의 전통은 기호학파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승(師承)과 학맥에 의해 계보를 형성, 최근에 이르기까지 전승, 발전해 왔다.
주기파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임성주(任聖周)·임헌회(任憲晦)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송시열은 기호학파의 정통적인 신념을 강화한 인물로, 이기론에 있어서도 치밀한 이론으로 이황의 견해를 비판,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다. 그는 이의 작용을 부인함으로써 이기호발설을 거부하였으며, 마음을 기라 하여 ‘심시기(心是氣)’라 한 이이의 학설을 따르고 마음을 이와 기의 결합으로 보는 이황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고제(高弟)로 스승의 학설을 이어 기가 곧 마음임을 재확인하고 있다.권상하의 제자 한원진은 나아가 "마음만을 말할 때에는 마음이 이와 기가 합해진 것이지만, 마음과 성품을 함께 말할 때에는 마음은 기요, 성품은 이일 뿐"이라 하였다.
주리파의 이기심성론은 이이의 ‘심시기’에서 비롯, 송시열·권상하를 거쳐 한원진에 이르면 ‘심즉기(心卽氣)’로 변화해 기의 작용을 더 한층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주리파의 이와 같은 기의 작용에 대한 강조는 다음 시대의 임성주에 이르면 마음뿐만 아니라 성품까지도 기로 파악하는 ‘유기론(唯氣論)’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는 마음과 성품은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양자가 모두 기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천지 만물에 가득 차 유행하는 것은 기일 뿐이고, 이는 기의 속성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서경덕(徐敬德)의 일원론적 주기론에 접근하였다.
임성주는 자신의 기 중심의 이기론을 전개함에 있어 이황뿐만 아니라 주희(朱熹)의 이기론까지도 자유롭게 반박하고 있으니, 이에 이르러 주기파의 주기론은 극단적인 기론(氣論)에 이르게 된다. 이후에 임성주의 주기론은 임로(任魯)·임헌회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밖에 근세의 인물 전우(田愚)는 절충적인 견지에서 이이의 이기일체론적 이기론을 다시 주장하였다. 또, 정통 성리학자 이외에 실학자에 대해서도 주기론적 경향을 가진 인물들을 주기파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주기파는 주리파와 함께 조선 후기의 모든 기간에 걸쳐 대립, 발전해 온 거대한 학파로서 한국 사상사, 혹은 학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조선 성리학의 전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정치 사상·사회 사상의 측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점에 대해서도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