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늘재[寒喧嶺] · 계립재[鷄立嶺] · 새재[鳥嶺]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은 위로 목조로 세운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석등, 당간지주 등 중요한 석조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김당개개와)’, ‘彌勒堂(미륵당)’, ‘彌勒堂寺(미륵당사)’, ‘院主(원주)’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이며, 1192년(고려 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이며, 이후 곧 복원되었고 조선 초기에 크게 수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고 18세기에 들어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 발생한 큰 수해로 법등(法燈)이 끊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011년 7월 28일자로 ‘중원 미륵리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해발 378m의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대원지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다. 석굴 중앙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의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부조되었다. 석굴 상부는 목조 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유산이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 초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형이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사원은 북향을 하고 있으며, 사원 전체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1977·1978·1982년 3차례에 걸쳐 시행된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여러 명문 기와와 건물지 발굴을 통해 사찰의 성격이 밝혀졌다. 특히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여행자 숙소 등 역원의 건물터도 함께 발굴되어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삼국유사』권1, 왕력(王曆)의 아달라니질금(阿達羅尼叱今)조에 “계립령금미륵대원동령시야(鷄立嶺今彌勒大院東嶺是也)”의 미륵대원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의 존폐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시기인 고려 충렬왕대까지는 존속되고 있었던 듯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자,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유일한 유적이다.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 · 목조 구조의 반축조(半築造) 석굴사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