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문(秦學文)은 1894년 12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6년 말경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08년 입학시험을 치르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부에 입학하였으나, 집안 형편으로 1909년 게이오의숙을 중퇴한 뒤 귀국하여 보성중학교에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1912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여 경상남도 진주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신익희(申翼熙)‧ 최두선(崔斗善)과 함께 1913년 3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년 동안 예과 과정만 밟다가 중퇴하였으며, 같은 해 4월 중국 상하이를 거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였다.
1915년 4월 도쿄외국어학교 러시아어학과에 입학하였고,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 학지광(學之光)』의 핵심 회원이자 총무로 활동하였다. 이후 도쿄외국어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자로 채용되었고,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경성지국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4월 『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정치경제부장, 1922년 9월 주간지 『 동명(東明)』 편집인 겸 발행인, 1924년 3월 『 시대일보』 편집인 겸 발행인, 1925년 1월 『호치신문〔報知新聞〕』 경성지국 통신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4월 10일경 가족과 함께 경성을 떠나 싱가포르와 로마를 거쳐 6월 말경 브라질 상파울루에 도착하여 잠시 채소 농장을 운영한 후 경성으로 돌아왔다.
1930년 경성상공협회 상무이사로 재직 중 만주로 건너가 1934년 일본 관동군 촉탁과 만주국 협화회(協和會) 촉탁으로 일하였다. 1936년에는 만주 지역 한국어 신문인 『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만주국 내무국 참사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만주국 총무청 참사관을 지내며 오족협화를 내건 최대 친일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9년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감찰관을 지냈으며, 1940년 5월 만주국 국책회사인 만주생활필수품주식회사 상무이사, 8월 만주국 협화회가 설립한 재만조선인교육후원회의 신징〔新京〕 지역 위원,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을 맡았다.
1945년 2월 윤치호‧ 박춘금‧ 이광수‧ 손영목‧ 주요한 등과 함께 대화동맹(大和同盟)을 결성해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6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총독부 자문 기구인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에 임명되었다.
8‧15광복 후 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어 반민특위의 조사가 시작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귀국해 불구속 송치되었다. 이후 경제계에 투신해 한국전쟁 중인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을 지냈고,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 지사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63년 4월 27일 신정당(新政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7월 1일 한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9월 28일 새로운 수필의 형성을 지향하는 공론동인회(空論同人會)의 동인이자 대표 간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한일 간 민간외교를 목표로 창설된 사단법인 한일협회(韓日協會) 창립을 주도하며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12월 정부와 유력 경제인 간담회에 경제계 대표 중 일원으로 참여하여 외환 위기 극복과 산업 구조의 개편, 임금 수준의 재조정 등을 요청하였다.
1964년 3월 27일 창립된 라틴아메리카협의회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같은 해 6월 1일 자로 정부의 정식 인가를 얻어 새로 발족한 이민공사(移民公社)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5년 4월 27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한국경제인협회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여 경제 시책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체육 발전에 관한 협조를 협의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 체결 전후로 한일 경제 협력 방안에 관해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고, 같은 해 12월 30일 『 동아일보』 칼럼에서 한일 경협에 의한 국가 경제 발전을 강조하였다.
1968년 4월 9일 『 경향신문』 대담을 통해 신뢰받는 신문이 되려면 사회의 목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9년 9월에는 국민투표대책위 공화당(共和黨)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1971년 3월 공화당 선거대책위원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4년 2월 3일 80세로 사망하였는데, 본인의 이름으로 “그동안 많은 총애를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신문 광고란에 부고 겸 감사의 말을 내기도 하였다.
진학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 17, 18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01-52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 대한유학생회학보』 잡지에 「쓰러져 가는 집」과 『대한흥학보』에 「요조한〔四畳半〕」이라는 단편소설을 필명 몽몽(夢夢)으로 발표하였다. 재일본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 러시아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콜로렝코, 안드레예프, 자이체프, 체호프 등의 단편소설을 잇달아 번역하였다.
1917년 4월 단편소설 『부르짖음(Cry)』을 『학지광』에 발표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신문관의 『 청춘』지에 모파상 단편소설 『더러운 면포(麵麭)』를 투고하였다. 같은 해 9월부터 『매일신보』의 연재소설란에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의 『춘희(椿姬)』(La Dame aux camélias, 1848)라는 파격적인 소설을 번안한 『홍루(紅淚)』를 연재하였다.
1922년 1월부터 『동아일보』에 일본 문학가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가 발표한 『그 모습〔(其面影〕』을 번역한 소설인 『‘소(小)’의 암영』을 연재하고, 이듬해 1월에는 연재한 원고를 모아 『암영』으로 제목을 고쳐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또한, 1922년 7월에는 잡지 『신생활』에 고리키의 『의중지인(意中之人)』을 번역하고, 같은 해 8~9월에 걸쳐 『동아일보』에 고리키의 『첼카슈(Chelkash)』를 번역하였다.
1923년 4월에는 잡지 『동명』에 모파상의 소설 『월야』를 번역하고, 1925년 8월 『매일신보』에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대표작 『도련님』을 번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