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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 / 참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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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의 오복제도(五服制度)에 따른 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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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상례의 오복제도(五服制度)에 따른 상복.
내용

상복 가운데 가장 중하게 여긴다. 따라서, 상복도 가장 긴 3년간을 입게 되어 있으며, 그 친족을 참최친(斬衰親)이라고 부른다.

참최복의 재료로는 베 가운데에서 가장 굵은 생포(生布:가공하지 않은 베)를 사용한다. 참(斬)이란 마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참최복은 생포의 가장자리를 바느질하여 마무르지 않은 채 만든 상복을 말한다.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 家禮輯覽≫에 따르면, 상복의 각 부분마다 베의 굵기가 다르게 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복의 종류나 시신을 매장하기 전과 후에 따라 각각 다른 굵기의 베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정복(正服:직계혈통의 친족이 입는 옷)의 경우, 윗옷과 치마는 3새[升], 관은 6새로, 그리고 시신을 매장한 다음에는 저고리와 치마는 6새, 관은 7새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의복(義服:혼인이나 출계를 통해서 맺어진 친족이 입는 옷)은 모두 3. 5새를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나 규정은 경제적인 이유나 일상생활의 조건에 의해서 실제로 지켜졌다기보다는, 단지 비교적 거친 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복은 남녀 상주에 따라 그 제도가 다르다. 남자의 상복은 관 · 효건(孝巾) · 윗옷 · 치마 · 중의(中衣) · 행전(行纏)으로, 여자의 상복은 개두(蓋頭) · 관 · 비녀 · 의상(衣裳)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밖에 남녀공용으로 수질(首絰) · 요질(腰絰) · 교대(絞帶) · 지팡이 · 신발[履] 등이 있다.

남자의 관은 5치 2푼 반 너비의 두꺼운 종이에 빨지 않고 다듬은 베를 감싸 발라서 만든다. 관은 벽적(襞積)과 무(武)로 되어 있다.

벽적에는 양쪽에 7푼 반씩을 남긴 채, 가운데에 주름[㡇]세 개를 오른쪽으로 접어, 바느질로 꿰매어 세 줄[梁]을 만든다. 무는 벽적의 양끝을 꿰매어 고정시키는 머리끈과 같은 것으로서, 삼끈을 사용한다.

무는 이마로부터 둘러 머리 뒤에서 엇갈려 양쪽 귓가에서 묶어 맨 다음, 남은 끈을 아래로 내려서 턱 아래에 매어 고정한다. 효건은 관 안에 쓰는 것으로, 속칭 두건이라고 부른다.

윗옷은 혼솔이 밖으로 향하게 하고, 치마는 앞은 세 폭, 뒤는 네 폭으로 하되, 혼솔을 안으로 향하게 한다. 앞뒤폭은 서로 닿지 않게 하여 허리끈에 달며, 매폭마다 세 개의 주름을 잡는다.

윗옷은 2자 2치 크기의 길[衣身] 두 폭과 2자 2치 크기의 소매[袂] 두 폭으로 되어 있으며, 길의 목부분에 깃[通 · 辟領]과 동정[加領]이 달린다. 깃은 양쪽 길의 목 부분을 네모지게 오려 밖으로 젖혀 접어 어깨쪽으로 댄 것이며, 깃 안쪽으로 동정을 따로 만들어 댄다.

그리고 왼편 길의 앞에 가슴을 가리는 최(衰)를 달고, 등에 부판(負版)을 단다. 또한, 길의 아래와 양쪽 겨드랑이 밑에는 각각 네모난 섶[帶下尺]과 제비꼬리같이 마른 옷자락[袵] 두 폭씩을 단다.

이 때 앞자락이 뒷자락을 가리게 단다. 소매는 끝에 아래로부터 1자 정도 꿰매어 1자 2치 길이의 소맷부리[袪 · 袖口 · 袂口]를 남긴다. 중의는 최복 안에 받쳐 입는 것으로서, 심의(深衣)와 같다. 옷가에는 베로 가선을 두른다.

혹은 중단의(中單衣)로 대신하기도 하는데, 두루마기[周遮衣]와 같은 것이다. 행전은 늑백(勒帛) 또는 박고(縛袴)라고도 부르는데, 이재(李縡)의 ≪사례편람 四禮便覽≫에 의하면, 예서에는 보이지 않으나 시속에 사람들이 베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자 상주의 개두는 머리에 써서 몸을 가리는 것으로, 세 폭의 베로 만든다. 참최복의 경우 옷가를 마무르지 않는데, 세속의 너울[羅兀]과 같은 것이다.

관은 재최 이상은 흰 것을 쓴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 개두와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 비녀는 머리를 걷어올릴 적에 사용하는 것이다. 의상은 남자의 윗옷과 비슷하나 섶과 옷자락이 없다. 그리고 치마는 앞의 좌우에 세 폭씩, 뒤를 여섯 폭으로 양옆을 서로 잇는다. 심의의 치마와 같이 윗옷에 이어 붙인다.

남녀공용의 수질은 관 위에 쓰는 것으로, 저마(苴麻:씨 있는 삼) 두 가닥을 서로 꼬아서 9치의 굵기로 만든다. 참최복에는 그 밑줄기를 왼쪽에 두고 이마를 따라 둘러, 그 끝을 밑줄기 위에 덧붙여 맨다. 그리고 양옆에 삼끈으로 긴[纓]을 달아 턱 밑에 내려 맨다.

요질은 교대 위에 매는 것으로, 삼 두 가닥을 서로 꼬아 7치 2푼의 굵기로 만들며, 양끝에 삼끈으로 소대(小帶)를 덧붙여 묶는다. 소대의 양끝은 3자 길이의 삼가닥을 산수(散垂)로 늘였다가 졸곡(卒哭) 이후에 꼰다.

교대는 요질 아래에 매는 것으로, 삼끈 18, 19자 되는 것으로 가운데를 꺾어 접어, 양끝에 1자 정도씩 남기고 묶어 고리를 만든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합쳐 꼰다. 이것을 왼쪽으로 허리에 둘러 오른쪽 끝을 고리에 끼워 매며, 지팡이는 대나무를 사용하고, 신발은 짚신을 신는다. 그 정복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것이다.

가복(加服:특별한 지위를 가진 친족을 다른 친족들과 구별하여 보다 중요시하여 입는 옷)은 적손(嫡孫)이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뒤에 할아버지 · 증조부 · 고조부가 돌아가셔서 승중(承重)을 했을 때와, 살아 있는 아버지가 맏아들이 죽었을 때에 입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뒤의 경우 ≪대명률 大明律≫과 ≪경국대전≫에는 장기(杖朞:지팡이를 짚고 齊衰일 년 동안 입는 제복)로 규정하고 있다.

의복으로는 첫째,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입는다. 이 경우 ≪의례 儀禮≫에는 기년복(朞年服)으로 되어 있다.

둘째, 남편이 승중하여 참최복을 입을 때나, 남편이 출계(出系:양자로 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를 하여 아내가 참최복을 입을 때 각각 따라 입으며, 아내가 남편이 죽었을 때나 첩이 남편과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입는다.

셋째, 남의 집으로 출계를 하여 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출계를 하여 그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다음 할아버지 · 증조부 · 고조부가 돌아가셔서 승중하였을 때 입는다.

그 밖에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어머니나 계모, 그리고 자모(慈母:어머니가 없어서 대신 길러준 어머니)를 위한 복과, 남의 집으로 출계한 사람이 그 집 어머니를 위한 복, 그리고 적손이 할아버지를 승중했을 때 입는 옷으로 ≪대명률≫에는 참최 3년으로 되어 있으나, ≪의례≫ · ≪가례≫ · ≪경국대전≫에는 재최 3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의례≫에는 장기, ≪대명률≫에는 참최 3년, ≪가례≫와 ≪경국대전≫에는 재최 3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한 복일 경우 ≪의례≫에는 기년으로, ≪대명률≫에는 참최 3년으로, ≪가례≫와 ≪경국대전≫에는 각각 재최 3년으로 달리 규정하고 있다. 그 밖에 첩의 아들이 본어머니를 위하거나 양부모를 위할 때에도 ≪대명률≫에는 참최 3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경국대전≫에는 재최 3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범위로 미루어 보아, 참최복에 해당되는 친족관계는 직계혈연을 중심으로 하거나, 가계를 직접 잇는 관계와 그 배우자를 위한 관계로 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 관계를 보다 좁혀 말한다면, 일상생활을 같이하는 가족단위를 중심으로 한 복제라고 하겠다. 1년째 되는 소상(小祥)에 남자는 수질 · 부판 · 벽령 · 최 등을 없애며, 여자는 요질을 없앤다. 그리고 옷감은 조금 가늘며 빨래한 베로 만든 연복(練服:소상 뒤로부터 禫祭전까지 입는 상제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연복의 제도는 앞의 상복과 같다. 그리고 대상(大祥)에는 흰 삼베로 만든 백립(白笠) · 직령(直領) · 망건(網巾) · 백화(白靴) 등의 연복으로 갈아입는다. 한 달 뒤 담제(禫祭)를 지낼 때 흰옥색[白碧色]의 담복(禫服)을, 그리고 길제(吉祭) 때 일상복(吉服)으로 갈아입는다.

참고문헌

『가례(家禮)』
『가례집람(家禮輯覽)』(김장생)
『사례편람(四禮便覽)』(이재)
『한국 전통사회의 관혼 상제』(장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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