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오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0대 충정왕의 능.
이칭
속칭
애기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352년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충정왕
높이
200㎝
지름
620㎝
소재지
개성특별시 개풍군
내용 요약

총릉(聰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오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0대 충정왕의 능이다. 총릉은 1352년에 조성되었으며, 북한 보존급유적이다. 총릉은 3층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으며, 1층단에 망주석 1쌍, 2층단과 3층단에 각각 석인이 1쌍씩 서 있다. 197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고, 널방에 부장되었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개풍군 오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0대 충정왕의 능.
건립경위

충정왕(忠定王, 1337∼1352, 재위 1349∼1351년) 왕저(王抵)는 충혜왕의 서자(庶子)이고, 어머니는 희비(禧妃) 윤씨이다. 충목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2세에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3년에 폐위되어, 14세에 강화도에서 독살당하고 그곳에 장사를 지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애기릉’이라고도 부른다.

변천

조선 현종 3년(1662) 조사한 바에 의하면 충정왕 총릉(聰陵)은 능의 봉토 태반이 무너지고 그 위에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루었는데, 왼쪽에는 김휘진(金彙晉)의 할아버지, 할머니 분묘가 있고, 사면의 주1주2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을 당하였으며, 1963년 실측 조사 당시 심하게 파손되고 매몰되어 12각 주3의 전면 40㎝ 정도만 노출되어 있었고, 그 주위를 빙둘러 12각 난간석이 존재하였다. 1978년 11월 발굴 조사를 통해 내부 구조가 밝혀졌으며, 회칠한 흔적은 없었다. 부장 유물은 대관통보(大觀通寶, 1107~1110)를 비롯하여 다수가 출토되었다.

형태와 특징

총릉의 능역은 약 589㎡로 협소하고 잡석을 쌓아 3층단으로 축조하였다. 봉분은 제1층단의 중심에 정남향을 향하고 있다. 봉토의 높이는 200㎝, 직경은 620㎝이다. 1963년 실측 이후 보수 정비를 하면서 화강석 두 단을 병풍석으로 쌓아 면석을

모서리돌주4과 당김돌이 있으며 주5은 매몰되어 있다. 난간석은 기둥 12개가 잘 남아 있다. 난간 기둥 사이의 거리는 190㎝, 난간 기둥의 높이는 50㎝, 방형 한 변의 길이는 22㎝ 내외이다. 주6는 보이지 않는다.

봉분 정면 좌우에는 480㎝ 간격의 4각 기둥으로 된 망주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서쪽 망주석의 높이는 270㎝이고, 동쪽 망주석의 높이는 272㎝이다. 병풍석에서 280㎝ 지점에 잡석으로 높이 30㎝를 축조하여 제1층단과 제2층단을 구분하고 있다. 제2층단에서 동서 양켠에는 1,490㎝ 간격을 두고 주7 1쌍이 서 있다. 제2층단에서 217㎝ 떨어져서 30㎝의 높이로 돌을 쌓아 제3층단과 구별하고, 한 쌍의 문석인을 일직선으로 마주 세워 놓았다.

2쌍 4기의 문석인들은 모두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들었는데, 대석 위 복두공복(幞頭公服)에 양손에는 을 든 모습이다. 제3층단에서 275㎝ 앞에 잡석으로 높이 50㎝를 쌓아 제4층단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아래 쪽에 정자각 터는 보이지 않는다.

총릉 문석인의 특징

충정왕 총릉에는 제2층단과 제3층단의 동서 양쪽에 주8 1쌍씩 총 2쌍 4기의 문석인이 배치되어 있다. 이 중 2단의 서쪽에 서 있는 문석인은 높이 200㎝로서 13세기 고려왕릉의 것보다 키가 커 늘씬해졌다.

문석인의 얼굴 너비는 25.6㎝이고 얼굴 두께는 25㎝로서 둥그스름하고, 문석인의 앞뒤 두께도 두툼하여 환조감을 주고 있다. 어깨 폭보다 넓게 공복 밑의 너비는 59㎝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석인상은 4기 모두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이목구비가 분명하다. 머리에는 복두를 썼는데 뒤쪽에서 보면 각(角)이 X자 모양으로 세밀하고 관모 아래쪽으로 머리카락도 가지런히 묘사되어 있다. 두 손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은 채 홀을 수직으로 쥐었는데, 팔꿈치보다 두 손이 ∧처럼 약간 위로 올라 있어 조각적인 솜씨와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공복의 경우 목은 단령으로 둥글고, 어깨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리면서 소매가 길어 무릎 아래 좌우로 길게 퍼져 내려오고 있다. 구부린 팔 사이로 자연스러운 주름이 묘사되었고, 소매의 부피감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두 손을 모은 아래 허리에는 대대를 띠었는데, 등 뒤쪽에서 보면 허리띠 아래로 야자대(也字帶)가 늘어뜨려져 있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문석인은 제31대 공민왕 현릉노국대장공주 정릉, 즉 현정릉의 문석인보다 양식적으로 선행되고, 이후 조선시대 문석인까지 양식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내부 구조 및 출토 유물

충정왕 총릉은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하였으며, 1978년 11월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조사하였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외칸의 돌칸 흙무덤이고,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며 회칠한 흔적이 없다.

무덤칸의 크기는 남북 길이 388㎝, 동서 너비 220㎝, 높이는 188㎝ 내외이다. 무덤칸의 바닥에는 동벽 남쪽 끝에서 동쪽 문기둥 돌을 지나 서쪽 문기둥 돌까지 너비 20㎝, 깊이 5㎝ 정도의 도랑이 배수 시설로 설치되어 있다.

발굴 결과 부장품은 길이 5.5㎝의 금동곳 1점, 높이 5.5㎝의 청동합 1점, 직경 12㎝의 청동거울 1점, 놋대접 안에서는 송나라의 연호인 대관통보를 비롯한 화폐 9개, 높이 12㎝의 놋대접 1개, 직경 45㎝의 놋버치, 원판형 장식품 6개, 길이 27㎝의 철제 자물쇠와 2개의 문고리, 쇠조각, 관못, 호박제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의의 및 평가

충정왕 총릉은 원나라의 간섭기에 조성된 왕릉 중 능주가 밝혀진 몇 안 되는 왕릉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특히 총릉에 세워져 있는 복두공복을 착장한 문석인 2쌍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에 선행되는 고려 말기 복두공복형 양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능묘조각사적 가치가 높다. 발굴 조사를 통해 널방에서 부장 유물까지 출토된 점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향토대백과』(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 한국평화문제연구소, 2005)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논문

박형열, 「고려왕릉의 특징과 변천」(『고고학』 제20권 제1호, 2021)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호 제1호, 2021)
권두규, 「고려왕릉의 봉분 형태」(『한국중세고고학』 5, 2019)
장경희, 「고려왕릉의 석인상」(『조선왕릉 석물조각사』 1, 국립문화재연구소, 2016)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주, 석등, 상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2

후세에 남아 보존됨. 또는 후세에 남기어 보존함.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벽체의 모서리에 사용되는, 기초를 닦는 돌이나 벽돌.    우리말샘

주5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6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石物)의 하나. 무덤을 지키게 할 목적으로 무덤 속에 넣거나 무덤 주위에 세운다.    우리말샘

주7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8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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