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초명은 최신지(崔愼之) · 최인연(崔仁渷)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종제이며,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최항(崔沆)의 할아버지이다. 신라 말 고려에 투항하여 문한관으로서 한 시대의 문명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해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郎瑞書院學士)에 제수되었다.
935년(태조 18)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었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으며,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 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해 태자사부로 있을 때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최언위가 찬정(撰定)한 것이었으며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언위는 최치원 ·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었는데, 최치원은 끝까지 신라를 섬겼고 최승우는 후백제 견훤의 책사가 된 반면에 최언위는 고려의 문한관이 된 것으로 보아 최언위의 문명이 짐작된다. 또한 서법(書法)도 남달리 아름다웠기 때문에,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聖住寺) 소재)의 비문을 찬술한 최치원의 부탁으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글씨를 쓰기도 했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朗圓大師悟眞塔碑銘)」 · 「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法鏡大師慈燈之塔碑銘)」 등을 찬하기도 하였다.
아들로는 최광윤(崔光胤) · 최행귀(崔行歸) · 최광원(崔光遠) · 최행종(崔行宗)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최광윤은 진(晋)에 유학을 가던 중 거란에게 붙잡혀 갔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오히려 관직에 등용되어 구성(龜城)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거란군이 고려를 침범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고려에 서신으로 알려와 광군(光軍) 30만을 설치하는 데 일조하였다. 최행귀는 오월국(吳越國)에 유학하여 비서랑(秘書郎)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