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8년(선조 1) 백인걸(白仁傑) · 이이(李珥) 등의 관료와 파주 일대 유생의 발의에 의하여 적성현감 성수침(成守琛)을 제향하고, 유생의 장수처(藏修處)로 삼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중종 · 명종 때 도학과 청절(淸節)로서 이름이 높아 당시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존재로 추앙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원은 선조 초에 있어 기호사림이 중심이 된 서인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수침의 아들 성혼(成渾)이 동인(東人)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1650년(효종 1) 비로소 파주 유생 백홍우(白弘祐) 등의 청액소(請額疏)를 계기로 사액을 받게 되었다.
1628년(인조 6)성혼을 추가 제향하고, 1705년(숙종 31)백인걸의 위패를 인근 자산서원(紫山書院)으로부터 옮겨와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5년(정조 9)성수침의 동생 성수종(成守琮)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퇴락하여 현재는 사묘(祠廟)만 남아 있으며,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사묘에는 성수침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성수종 · 백인걸 · 성혼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봄 ·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