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몽주가 1355년(공민왕 5)에 부친상을 당해 여묘 삼년(廬墓三年: 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삼년간 지킴)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365년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여묘 삼년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다했으므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그의 출생지인 우항리에 공양왕 원년(1389) 당시 영천군수인 정유(鄭宥)가 ‘孝子里(효자리)’라 새긴 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성종 18년(1487)에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순력(巡歷: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함) 중 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던 밤에 현몽(現夢: 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이 있어, 다음날 촌로와 더불어 땅 속에 묻혀져 있던 비석을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호하였다. 그후 선조 40년(1607) 군수 황여일(黃汝一)이 비각을 중수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은 전면에 일각대문을 두고 주위에 토석 담장을 둘린 방형곽 안에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비각 내 후면으로 치우쳐 바닥보다 한 단 높게 시멘트로 비신 대좌(臺座)를 만든 다음 비를 세웠다.
석재는 화강암이며, 이수(螭首: 비석의 머리) 없이 비의 정면 중앙에는 큰 글씨로 ‘孝子里’라 썼고, 그보다 작은 글씨로 오른쪽에는 ‘功臣贊成事大提學 鄭夢周 庚午封 益陽郡 忠義君(공신찬성사대제학 정몽주 경오봉 익양군 충의군)’, 왼쪽에는 ‘洪武己巳三月 永川郡守鄭宥立碑(홍무기사3월 영천군수정유입비)’라고 썼다.
비각 네 모서리에는 자연석 주초(柱礎) 위에 원주를 세우고, 기둥간에는 나무살창을 둘렀으며 굴도리(둥글게 만든 도리)를 사용한 소로 수장집이다. 지붕 가구는 중심부에서 네 모서리로 추녀를 걸쳐서 구성한 사모지붕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지붕 기와잇기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