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순절한 가산군수 정시(鄭蓍)를 비롯한 임신칠의사(壬申七義士)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평안도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정시는 난이 발발한 직후 군민을 모아 적에 대항하려다 사로잡히자 투항을 거부하여 살해당하였다. 나머지 6인의 의사는 한호운(韓浩運)·백경한(白慶翰)·박지환(朴之煥)·허항(許沆)·제경욱(諸景彧)·김대택(金大宅) 등인데, 이들도 난중에 의(義)를 지켜 모두 죽었다.
1824년(순조 24) 장령 박영현(朴榮顯)이 이들을 제향하는 사우가 건립되어 있으니 사액을 내려 충절을 장려하도록 상소하였다. 이에 묘당(廟堂)에서 논의를 거쳐 표절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지방관에게 봄·가을 향사(享祀)에 제수(祭需)를 지원하도록 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한 서원 훼철 때에도 대상에서 제외되어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