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동 고분군 ( )

하시동 고분군
하시동 고분군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에 있는 삼국시대 구덩식 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명주하시리고분군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하시동고분군(下詩洞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지정기관
강원특별자치도
종목
강원특별자치도 시도기념물(1973년 07월 31일 지정)
소재지
강원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 129-3번지 외 8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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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에 있는 삼국시대 구덩식 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1973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원래의 행정지명은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하시리였던 까닭에 흔히 ‘명주 하시리고분군’이라고 하였다.

이 고분들 중 도굴되어 파괴된 두 무덤에 대한 수습발굴조사가 1970년 8월 25일부터 8월 31일까지 이루어졌다. 그 뒤 1978년 11월 1일부터 11월 17일까지 유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제2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유적의 성격이 일부 밝혀지게 되었다.

제1차 조사

제1차 조사 때에는 장방형 구덩식 돌덧널무덤[長方形竪穴式石槨墓]가 조사되었다. 돌곽은 전체 길이 352㎝, 폭 60∼66㎝, 깊이 80㎝ 규모이다. 네 벽은 길이 20∼40㎝, 폭 5∼10㎝ 크기의 자연석을 사용해 5, 6단으로 쌓았다. 바닥에는 납작한 냇돌을 드문드문 깔았다.

서쪽으로 납작한 판자모양의 판석(板石)을 세워 칸막이를 만들어 유물을 넣는 부곽(副槨)을 마련했다. 동편이 서편보다 약간 넓고 부곽의 서쪽 벽 끝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주곽(主槨)과 부곽 위로는 평균 길이 130㎝ 내외, 폭 35㎝ 내외, 두께 16㎝ 내외의 판석을 여러 개 덮어 천장을 만들었다. 그 위로 흙을 덮어 봉토(封土)를 만들었다. 시체의 머리가 놓인 방향은 동쪽이다.

부장품의 상태는 도굴되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남아 있는 상태로 볼 때, 주·부곽의 부장품이 놓인 위치의 바닥에는 납작한 냇돌을 깔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부장유물의 안전을 고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물은 부곽에 바닥이 둥근 비교적 큰 항아리[圓底壺]를 중심에 놓고 주변으로 돌아가며 보다 작은 항아리를 놓았다. 주곽은 도굴되어 확실하지 않으나 시체의 머리부분 밖으로 긴목항아리[長頸壺] 2개와 굽다리접시[高杯] 7개를 놓았다.

또 조사된 다른 무덤 하나는 도굴로 인한 교란과 파괴가 매우 심해 전체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부곽이 없다는 차이가 있을 뿐 앞의 것과 비슷하였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고분군은 돌곽분(石槨墳)으로서 머리부분이 넓고 다리부분이 좁은 두광족협(頭廣足狹)의 형태이다. 주곽과 부곽을 구분해 부곽에 유물을 넣은 경우와 주·부곽을 구분하지 않고 유물을 부장한 두 가지로 대별된다. 주곽과 부곽을 구분한 예로는 경상남도 울주군 언양면 일광리의 돌곽묘에서도 보인다.

묘제(墓制)에 있어서는 시체를 위로부터 아래로 넣고 천장개석(天障蓋石)을 덮은 봉토에 하나의 석실을 마련한 수혈식석곽묘로서 낙동강 서안인 함안·고령·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돌곽묘와 비슷한 점을 많이 보이고 있다. 시체 역시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똑바로 안치하였다.

이 고분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에서도 고식(古式)에 속하고 있다. 이 유적은 동해변에 산재해 있는 고분연구에 있어서 비중이 큰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조사

1978년 제2차 조사 때에는 돌곽묘 1기와 기타 부석유구 5기가 조사되었다. 특히, 규모가 비교적 큰 돌곽형태의 유구는 길이 7.2m, 폭 4.2m이다. 유구 바닥은 진흙 위에 돌을 깔고 다시 진흙으로 덮어 깔았다. 이 둘레를 따라 높이 30㎝ 정도의 돌벽을 마련하고 다시 긴벽에 붙여 길이 4.8m, 폭 3m 규모의 내곽벽을 마련하였다. 출토유물이 거의 없어 유적의 성격이 불분명하다.

이 외에 무질서하게 돌이 깔려 있는 상태의 유구도 조사되었다. 유구의 성격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구의 하부에 붉은 모래층이 1∼2겹 깔려 있는 공통점이 확인되어 주술적(呪術的)인 성격의 유적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유물이 모두 파편으로 벽면에 붙어 있거나 벽 밖에서만 수습되어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붉은 색은 피를 상징하며, 부활의 뜻으로 해석되는데, 특히 바닥 하부에 인위적으로 붉은 모래를 쓴 것은 붉은 색이 갖는 주술적인 의미와 관계됨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제1∼2차 조사를 통해 나타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하시동 유적은 삼국시대 신라영역으로 되었을 때의 분묘이며,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특이유구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강원도명주하시동고분군조사보고서』(강원도, 1981)
「명주군하시동고분조사보고」(김정기·이종철, 『고고미술』110,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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