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호(長頸壺)’라고도 하며 둥근 몸통에 짧은 목이 달린 단경호(短頸壺)와 구별된다. 대개 바닥이 둥글거나 약간 위로 올라와 있으며, 대(臺)가 달리거나 달리지 않은 경우의 두 가지가 있다.
목항아리는 고배(高杯)와 함께 신라토기의 대표적 기형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 의미로서의 긴 목이 달린 항아리의 형식은 신석기시대부터 보이며, 청동기·초기철기시대에도 계속 사용된다.
특히,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黑陶〕는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에서 주로 청동기와 함께 출토된다. 이 토기는 둥근 단지 위에 긴 목이 붙은 광택이 나는 항아리로서 쇠뿔모양손잡이〔牛角形把手〕와 조합되어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의 와질토기(瓦質土器) 형식으로 변화되어간다.
본격적인 신라 목항아리의 형식은 원삼국시대 말기에 회청색경질토기로부터 출현해 서기 300년경 이후 고배 기대(器臺) 등과 함께 신라토기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목항아리의 특징인 납작밑에서 둥근밑에로의 전환은 이미 김해토기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긴 목은 물의 운반·저장 등 새로운 생활양식의 필요에서 생겨난 신라토기의 자체적 발명으로 보인다.
신라의 목항아리는 낙동강 서편에서 주로 출토되는 가야의 것과는 지역적 차이가 있다. 신라의 것은 목과 어깨의 접착부가 각을 이루며, 바닥에 대가 달리는 경우가 많고, 무늬는 각종 기하학적 무늬 이외 조그만 토우(土偶)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의 것은 목과 어깨는 곡선으로 연결되며 대개 대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굽받침이나 높은 기대에 얹혀진다. 그리고 무늬는 주로 물결무늬에 한정된다.
신라의 목항아리는 전기·중기·후기로 가면서 양식상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전기(4세기 초∼5세기 중엽)에는 목과 대가 굵고 튼튼하게 만들어지며 대에 구멍〔投窓〕이 일렬로 뚫린다. 중기(5세기 중엽∼6세기 중엽)에는 몸이 아가리에 비해 작아지며 대에는 구멍이 2단으로 배치된다.
후기가 되면 형식상의 퇴화기에 접어들게 되어 대가 축소되고 구멍의 크기도 작아지며 전기나 중기에 비해 문양의 종류도 적어진다.
이러한 목항아리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 출토량이 크게 줄어들고 중국쪽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기형인 병모양그릇이나 인화문(印花文)이 있는 유개호(有蓋壺) 등으로 대체된다. 기형도 얕은 굽형식에 퇴화된 느낌을 주며 전체적으로 고배와 더불어 소멸기에 접어든다.
전반적으로 신라의 목항아리는 실용적 기능에서 출발한 듯하지만, 토우를 비롯한 표면의 다양한 장식 등에서 제사나 의식에 관계된 그릇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