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은 1797년(정조 1)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에 건립된 주택이다. 하회마을의 충효당과 함께 하회마을의 남촌 지역을 대표하는 살림집으로 1797년 유기영의 조부인 유치목이 건립한 주택이다. 유치목이 건립할 당시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 별당, 사당, 새사랑채, 대문간채, 헛간채, 방앗간채, 장고방, 화장실 2동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었는데, 1953년 소실되어 사당과 별당과 대문간채만 있던 것을 2011년 정침과 방앗간채만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安東 河回마을 念行堂 古宅)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 마을에 있는 고택으로, 하회 마을은 풍산류씨(豐山柳氏)의 씨족 마을로 화천을 중심으로 빼어난 자연 경관과 민속 문화가 보전 전승되고 있는 반촌(班村)이다. 이 고택은 근처에 있는 안동 하회 충효당(忠孝堂)과 함께 하회 남촌(南村)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남촌댁(南村宅)으로도 불리었다. 이 고택은 1797년(정조 1) 유기영(柳驥榮, 1825~1880)의 조부인 대사간(大司諫) 유치목(柳致睦)이 건립하였으며, 조선 후기 형조좌랑(刑曹佐郎)을 지낸 유기영의 살림집으로 염행당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고택은 안동 하회마을의 남촌 지역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출입할 때는 마을 중심의 안길에서 남측으로 난 안길의 서측에 위치하여 남향한 대문간채를 이용한다.
이 고택은 유치목이 건립할 당시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正寢), 별당(別堂), 사당(祠堂), 정자(亭子), 대문채, 방앗간채 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었는데, 1953년 화재로 정침과 정자가 소실되어 별당채를 주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정자는 인근에 있던 정자인 백률원(百栗圓)을 옮겨 세워 중창(重創)하였지만, 정침 터는 2011년 중건(重建)하기 전까지 빈터로 남겨져 있었다. 이 집은 1979년 1월 26일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별당과 대문채는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1979년 보수를 하였고, 1984년에는 사당을 보수하였다. 이후 별당채 협문(夾門)과 주변 담장을 보수하였다. 백률원은 2011년 정침을 중건하면서 원래 위치로 이건하였다.
염행당은 사면이 토석(土石)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측과 동측은 마을 안길을 따라 대문간채와 담장이 조성되어 있고, 서측과 북측은 이웃과의 경계에 담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외에 고택은 내부의 별당 영역과 사당 영역에 별도 담장을 쌓아 영역을 분리하였다. 현재 고택은 2011년 중건한 정침을 중심으로 정면에 대문채가 있고, 안채 동측에 사당과 별당채가 있으며, 중문간(中門間) 서측에 방앗간채가 있다. 별당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ㅡ자형으로 사당 동측에서 동향을 하고 있으며,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여 후원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평면은 남측부터 1칸 부엌, 2칸 온돌방, 1칸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부엌 없이 커다란 대청이 있는 접객 전용 공간이었으나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개조하였다. 부엌은 아궁이 상부에 누마루였던 구조를 하부에 벽체를 시설하여 누마루를 안방 다락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부엌 외벽은 기와 편으로 문자와 그림을 넣어 장식하였다. 별당의 앞마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담장 앞에 화장실이 있다. 별당채의 목가구는 자연석 주초(柱礎)에 사각기둥을 세웠는데, 정면의 양 모서리 기둥만 원기둥이다. 기둥 상부는 보아지를 끼운 후에 보, 장여, 굴도리를 납도리 방식으로 결구하였다. 가구(架構)는 3량(三樑)이고, 지붕은 한식 기와를 올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안채의 동측 후면에 있는데, 토석 담장을 사면에 둘러 별도 영역을 확보하였으며, 정면에만 별도 담장을 이중으로 축조하여 외부와 공간을 분리하였다. 이 담장은 하부에 토석 담장으로 축조하고, 상부에 와편(瓦片)으로 문양을 넣어 장식하였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내부에 좌상(左上)을 원칙으로 유기영(柳驥榮), 유영우(柳永佑), 유시일(柳時一), 유경하(柳景夏) 네 분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사당 동쪽 둘레담의 남쪽 벽에는 충효당 사랑채에 걸린 현판 글씨와 같은 전서체의 ‘忠孝’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기둥 상부는 보아지를 끼운 후에 보, 장여, 도리가 납도리 방식으로 결구되어 있다. 가구는 3량이고, 지붕은 한식 기와를 올린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1칸이 솟을대문 형식이고 양쪽의 6칸은 모두 고방(庫房)이다. 대문간은 막돌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후, 기둥 상부를 납도리로 하여 납도리 방식으로 결구하였다. 지붕은 한식 기와를 올린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2011년 중건한 정침은 ㅁ자형으로 정면의 사랑채 동측 사랑방과 사랑대청이 동측과 남측으로 돌출한 구조인데, 정면으로 반 칸, 측면 3칸이 돌출하였다. 사랑방 서측에는 사랑방 부엌, 중문간, 고방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서측부터 동측으로 부엌, 안방, 대청, 상방(上房)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정면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안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상방 정면으로 좌우익(左右翼) 실을 배열하여 사랑채와 연결하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사각형의 주추에 사각기둥을 세워 상부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기둥 상부는 직절(直切)형 익공재(翼工材)를 이용한 초익공(初翼工) 방식으로 결구하였고, 가구는 오량(五樑)이다. 지붕은 한식 기와를 올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현재 백율원은 이건 이후 마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백율원의 자리에는 원래 새사랑채가 있었다. 사랑채와 대문간채 중간에는 내외담이 있었으며, 내외담 동측 마당에는 헛간채가 있었다. 그리고 안채의 뒤뜰에 장고방과 장독대가 있었다.
안동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은 하회마을 남촌 지역을 대표하는 가옥 중 하나로, 화재로 인해 정침 및 기타 건물이 소실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은 후, 정침을 중건하여 건립 당시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지만, 원래 건물과 중건한 건물 등은 경상북도 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반가 연구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염행당은 기존 하회마을의 고택처럼 사랑채가 돌출한 ㅁ자형 정침이지만 새사랑채와 대문채, 헛간채뿐만 아니라, 별도의 담장을 구획한 별당과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주거사(住居史) 및 주생활 문화 연구를 위한 학술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