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고택(延谷古宅)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渚谷里)의 제곡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야옹(野翁) 권의(權檥, 14751558)의 8세손인 연곡(延谷) 권성익(權聖翊, 17351821)이 1795년(정조 19)에 창건하였다. 연곡은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4~1782)의 문인(門人)으로 안동 사람이며 학문이 해박하고 행위가 밝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학자이다. 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贈職)되었다. 제곡마을은 서측의 산을 등지고 동측의 들녘과 들녘을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을 바라보고 있으며, 산자락과 농경지의 경계선을 따라 가옥들이 동향 및 남향하고 있다. 제곡마을에는 연곡고택 이외에 2016년 보물로 지정된 예천 야옹정(野翁亭)과 1993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춘우재 고택(春雨齋古宅)과 201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함취정(咸聚亭)이 있다.
고택은 창건 이후 안채, 사랑채 및 행랑채(行廊채)가 하나로 연결된 정침(正寢)과 대문간채, 사당이 1994년 7월에 경상북도 민속 자료 연곡고택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종별 변경에 따라 2017년 5월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변경되었다. 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99년에 구조적으로 변형된 정침을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였다. 대문채는 2000년 8월부터 11월 사이에 슬레이트 지붕을 초가지붕으로 보수하였으며, 훼손된 벽체 및 내부 공간도 수리하였다. 고택은 2002년 외곽을 감싸고 있는 토석 담장과 석축을 정비하였고, 주변 배수로도 정비하였다. 사당은 2014년 사주문(四柱門)을 보수한 후 2015년 지붕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고택은 동서로 난 마을길을 따라 진입하여, 다시 이 길과 직교한 대문채 앞 안길로 출입한다. 고택은 대문채를 제외한 사면에 토석 담장을 둘러 외부와 경계를 짓고 있다.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된 정침과 대문채, 사당이 동남향을 하고 있다. 고택의 평면은 ㅁ자형 뜰집을 기본으로 정면 좌우측으로 실이 돌출한 확장형 ㅁ자형의 뜰집이다. 안채는 6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남측에 1칸 반 규모의 윗방과 안방이 있고, 안방 동측으로 2칸 규모의 부엌이 있다. 대청 북측에는 각 1칸 규모의 고방과 마루가 있고, 마루 동측으로 부엌과 사랑방에 딸린 방이 있다. 사랑채는 대청 정면의 중문간을 중심으로 동측에 2칸 규모의 사랑방과 돌출한 1칸 규모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는 중문간 남측에 방 3칸이 연속되어 있는데, 중앙 방은 안방에 딸린 부엌과 연접해 있고, 방 1칸은 외부로 돌출해 있다. 대문채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북측에 1칸 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남측에 1칸 규모의 외양간이 있다. 사당은 사주문을 세우고 토석 담장을 둘러 안마당 동측에 별도의 영역을 마련하였다. 사당은 전퇴(前退)가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인데, 전면 툇간은 봉당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로 마감되어 있다.
안채 대청의 기둥 상부는 외부 끝을 수직으로 잘라내고 내부 끝을 초각(草刻)한 보아지를 끼워 보를 받도록 한 민도리 방식으로 짜여 있다. 이외에 사랑채와 안채의 기둥 상부는 내외 끝을 수직으로 잘라낸 보아지를 결구한 민도리 방식으로 짜여 있다. 가구는 3량이고, 처마는 홑처마다. 특히 안대청은 긴 처마 서까래만을 이용하여 홑처마와 3량으로 천정을 구성하여 단순하면서 개방된 공간감을 제공한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기본으로 하여 추녀를 사용하지 않는 서산각지붕이며, 좌우로 도출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사당의 정면 툇기둥 상부는 초각한 익공재(翼工材)로 결구한 초익공(初翼工) 방식으로 짜여 있으며 배면은 민도리 방식으로 짜여 있다. 가구는 5량이고, 처마는 겹처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박공(牔栱)면에 풍판(風板)을 걸어 마감하였다. 대문간의 기둥 상부는 보아지를 사용하지 않은 민도리 방식으로 짜여 있다. 가구는 3량이고, 처마는 홑처마다. 지붕은 우진각(隅進閣) 모양의 초가지붕이다.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 뜰집이 정면 좌우측으로 실이 돌출한 확장형의 한 예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 이르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유입 및 분파 과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또한 주거건축문화의 전파와 인적 교류 등의 인문학적 전개 과정을 살필 수 있어 주거사(住居史)와 관련해 학술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