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우재 고택(春雨齋 古宅)은 안동권씨(安東權氏) 복야공파(僕射公派)가 세거(世居)한 마을 중 하나인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의 작은맛질에 있는 옛집이다. 이 집을 처음 지은 춘우재 권진(權晋,15681620)은 복야공파의 파 시조 권수홍(權守洪)의 10대손이고, 작은맛질의 입향조인 야옹(野翁) 권의(權檥, 14751558)의 손자이고, 예천 야옹정(醴泉野翁亭)을 지은 권심언(權審言, 15021574)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첫째 형 매당(梅堂) 권욱(權旭, 15561612)을 따라 의병 활동을 하고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이 되었다. 권진은 형 권담(權曇)의 아들 권상경(權尙經)을 자신의 후사로 삼았고 이후 대를 이어 학문에 힘썼다.
원래의 집은 권진의 사후인 1625년(인조 3)에 불타서 다시 지었고, 현재의 집은 19세기 초 순조(純祖) 연간(1801~1834)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근대에 편의를 위한 유리창 설치 같은 변형이 있었다고 하나 1993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후 복구한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998년, 2000년, 2001년, 2016년 등에 보수를 시행하였다. 1993년 조사 당시에는 정침 좌측에 곳간 2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춘우재 고택은 작은맛질의 진산인 작약산을 뒤에 두고 마을 가운데에 입지했으며 좌향은 약간 남쪽으로 기운 동향이다. 같은 마을의 연곡고택이 북서쪽에 있고, 집앞인 동쪽의 전답 너머로 한천이 남북 방향으로 흐른다. 담으로 둘러싸인 앞마당의 우측 모서리로 진입하면 정면 5칸, 측면 7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있고, 정침 좌측 뒷편으로 사당이 있다.
정침의 ㅁ자는 중문과 좌우의 익사(翼舍), 안채로 이루어지는데, 중문과 좌우 익사는 팔작지붕이 꺾인 형태로 ㄷ자로 연결된다. 정면 중앙의 중문 왼쪽에는 마굿간이었던 방 1칸이 있고, 오른쪽에는 문간방이 있다. ㄷ자 좌우의 꺾임부에 각각 앞뒤로 2칸씩의 마루가 있는데, 이 중 우익사(右翼舍) 쪽 마루가 사랑마루이고, 1칸 반 규모의 사랑방이 있다. 즉, 집 우측이 사랑 공간이므로, 정면 우측에는 쪽마루를 달아 내고 평난간을 다는 등 격이 높은 의장으로 좌측과 구별지었다. 사랑방 뒤에는 통래간(通來間)을 겸하는 반 칸의 작은 사랑 부엌과 고방이 이어진다. 사랑 부엌 상부의 다락은 안마당에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좌익사(左翼舍) 쪽 마루 다음에는 방 1칸과 2칸 규모의 큰 부엌이 이어진다. ㄷ자의 양 끝에서 좌우 익사는 안채 좌측의 안방과 우측의 상방까지 이어지며, 안방과 상방은 안채 후면의 좌우 끝 칸에서 뒤로 반 칸씩 돌출하여 전형적인 ㅁ자집이 약간 변형된 형태이다. 안방은 후면의 돌출부를 포함하여 ㄴ자로 꾸몄다. 안마당을 면(面)하는 안방 앞과 안대청 앞에 3칸 길이의 툇마루가 붙었다.
정침 중 안채 지붕만 5량가이고 나머지 ㄷ자 부분은 3량가이다. 안마당과 면하는 안채 정면만 소로수장(小櫨修粧)으로 꾸몄고, 안대청 천장에 노출된 가구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올렸다. 정침의 안대청 전면 기둥은 밑둥에서 1.8척 정도 올라온 부분부터 강하게 귀를 접어 기둥이 둔중해 보이지 않도록 다듬었는데 상주 양진당(養眞堂)에도 쓰인 고급 기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태에 단청을 하였다.
조선 후기 경북 북부 ㅁ자집의 전형에서 약간 변형된 평면과 지붕 구성이 특징정이며, 강하게 귀를 접은 기둥 치목은 역사가 오랜 고급 기법이 19세기에도 전승된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