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남악 종택은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불구당 김왕의 생가인, 예천 구계리의 ㅁ자형 가옥이다. 후대에 남악 김복일의 후손이 이 집을 매입하여 의성김씨 남악파의 종택으로서 문중과 지역의 문화적 구심점이 되었다. 남악 종택은 국사봉 산기슭에서 학가산을 바라보며 동향하여 갈마음수 형국에 입지해 있다. 측면으로 돌출한 누각 형태 사랑채의 건축 기법이 뛰어나며, 전면에 덧붙은 초가지붕의 문간채로 인하여 외관이 독특하고 내외에 다양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조선 중 · 후기 경상북도 권역 ㅁ자집 중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예천 용문면 구계리에 있는 이 집의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1981년 기와 보수 때 발견된 명문(銘文) 기와에 “숭정(崇禎) 17년 병술 3월일에 용문사 승려 운보가 만들었다.”라고 되어 있어 1644년(인조 22)에 중수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이 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불구당(不求堂) 김왕(金迬, 16061681)의 생가이고, 17세기 이래로 불구당의 가문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안이 소유하였다. 따라서 현존 건물은 김왕의 아버지 도사공(都事公) 김극계(金克繼, 15761621)가 구계리에 입향(入鄕)하면서 김왕의 출생 이전인 1600년대 초에 건립했거나, 그 이전부터 있던 집에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한때 전주이씨(全州李氏)에게 매도가 되었으나, 의성김씨 남악공파(南嶽公派)의 후손이 다시 매수하여 이후 의성김씨 남악공파의 종택(宗宅)이 되었다. 남악공파는 이황(李滉)의 문인이고 벼슬이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이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의 후손이다. 김복일은 안동 내앞마을에 살았던 의성김씨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다섯째 아들인데 예천권씨(醴泉權氏) 가문인 권지(權祉)의 딸과 혼인하면서 예천 금당실(金塘室)에 입향하였다. 불구당과 남악은 삼종숙질간(三從叔姪間)이며, 인접한 예천권씨 초간종택(草澗宗宅)의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남악의 손위 처남이다.
남악 종택에서는 2020~2021년 예천박물관에 문중 소장 자료 2,534점을 기탁하였다. 이에는 조선 최초의 금속 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15세기 초에 인쇄한 농학서(農學書)인 『사시찬요(四時纂要)』, 16세기 말에 나온 경서의 한글 활자본 『맹자언해』 등 다수의 귀중본과 1769년(영조 45) 당시의 군수가 남악 선생 묘소에 묘직 1명을 두고 군포(軍布), 잡역(雜役)을 면제하고자 발급한 「기축년 완문(完文)」 등 문중의 역사를 보여 주는 고문서들이 포함된다.
남악 종택은 구계마을 깊숙한 곳의 국사봉 산자락 끝에서 학가산을 바라보며 동향하여 입지해 있는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渴馬飮水) 형국이라 한다. 경사지에 올라선 정침(正寢) 전체가 안마당을 ㅁ자로 둘러싸는데, 정침의 앞부분을 이루는 중문채와 사랑채가 각각 ㅁ자의 좌우로 돌출한 형태이다. 그 앞에 문간채와 중문채로 둘러싸인 행랑 마당이 붙는 것이 남악 종택의 대략적인 구조이다.
종택의 정면에서 보면 정침의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돌출해 있다. 정면 가운데로부터 왼쪽으로는 초가를 덮은 맞배지붕의 문간채가 」자형으로 꺾여 길게 이어지면서 정침 앞을 가리고 있으며, 문간채의 꺾이는 부분에는 행랑(行廊)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 있다. 문간채 뒤에 숨은 정침 앞면의 나머지 부분은 중문채인데 문간채와 연결된 부분의 왼쪽 칸에 중문간을 내어 중문채 앞의 행랑 마당과 안마당을 연결하였고, 오른쪽으로는 사랑채에 연결된 부엌간에 판문을 내었는데 이 역시 안마당으로 통한다. 중문채 뒤로는 안채와 좌우 날개채가 ⊓자형으로 붙어서 안마당을 둘러싸고 정침의 구성을 완성한다.
사랑채는 정침의 정면 우측, 즉 북쪽에 있으며 후대에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전면 3칸, 측면 3칸의 큰 규모로 지은 5량가 팔작지붕 집이고 정면의 누마루 안쪽에 가학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사랑채 전면의 툇간은 누마루로 꾸미고 전면과 우측면, 후면 일부에 걸쳐 헌함(軒檻)과 계자 난간(鷄子欄干)을 둘렀으며, 헌함 아래에는 원형의 단면에 자연목의 굴곡이 남은 누하주(樓下柱)를 받쳤다. 사랑채는 문간채 및 중문채의 낮은 지붕과 대조되도록 우뚝 솟아 있고 팔작지붕은 중문채의 지붕과 떨어져 있고 전면과 측면에서는 온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마치 독립된 누각처럼 보인다. 좌측면의 정면쪽 툇간에 판벽과 판문, 목제 계단을 설치하여 누마루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좌측면 가운데에는 중문채의 우측 끝 칸이 연결되는데, 사랑채에 불을 때는 1칸 규모의 부엌을 만들었고 작은 문을 내어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통래간(通來間)을 겸한다. 사랑채 후면 좌측 칸과 정침의 우익사(右翼舍)가 연결된 곳에도 불을 때는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사랑채의 온돌방 네 칸은 이들 부엌과 아궁이에 연결되는 건물 왼쪽 부분에 전(田)자를 이루며 배치되는데, 앞의 두 칸이 사랑방, 뒤의 두 칸은 책방과 지필방(紙筆房)이라 한다. 방 천장에는 격자형으로 견실하게 짠 반자(盤子)를 설치하였다. 오른쪽에는 마루방 두 칸이 있는데 우측 후면 모퉁이의 마루방을 옥방이라 하여 벌하여 다스릴 사람을 가두는 데 썼다고 한다.
문간채는 」자형 평면의 초가 맞배지붕집으로 행랑 마당을 둘러싸면서 중문간과 사랑채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보 방향 1칸의 3량 구조이다. 전면 6칸에 왼쪽부터 온돌방 2칸과 부엌 1칸, 마구간 1칸, 문간과 방 1칸이 이어지고 중문채 쪽으로 꺾인 두 칸은 창고로 쓰이다가 근래에 화장실로 개조되었다. 문간채 의창고방 모서리와 중문채 정면 사이는 토담을 쌓아 막았는데 담장이 중문채에 붙는 쪽에 협문(夾門)을 내어 사랑채 쪽과 통행하게 하였다.
중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집인데, 좌측의 두 칸은 정침의 ㅁ자 밖으로 튀어나가 있다. 그 다음 세 번째 칸의 후면에서 안채 좌측의 날개채와 연결되고 4번째 칸이 중문간이다. 중문간과 맨 끝의 사랑채에 연결된 부엌 사이의 칸은 바닥을 강회다짐하고 상부에 우물마루를 짜서 창고로 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5량가 규모에, 대청 위에 가로판 대공을 올렸다. 안채 전면 좌우의 칸 앞으로 1칸 너비 3량가의 좌우 익사(翼舍)가 붙어 ⊓자형을 이룬다. 좌익사(左翼舍)는 중문채, 우익사는 사랑채와 이어진다. 안채의, 큰 맞배지붕이 좌우 익사의 맞배지붕 위에 올라앉은 형태이다. 원래 안대청은 안마당과 같은 폭으로 이어지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였고 안대청 왼쪽에는 맨 뒤의 골방 1칸, 그 앞에 좌측 날개채의 반 칸을 포함하는 1.5칸의 안방, 그 앞으로 부엌이 이어졌다. 1980년대에 안대청 좌측칸에 온돌방을 증설하면서 옛 골방과 벽을 터 ㄱ자형의 안방을 만들고, 옛 안방 자리에 부엌이 들어서도록 개조하였다. 안대청 뒷벽의 각 칸에는 판문을 단 창문이 설치되어 있고, 중간 설주(舌柱)가 있다. 창문의 설주는 조선 중기까지만 쓰인 오래된 형식이다. 온돌방으로 개조된 대청의 맨 왼쪽 뒷벽의 창문은 반침(半寢)을 설치하면서 개조되었으나 창문틀의 규격과 중 간설주가 있던 장부의 구멍은 그대로이다. 안대청 오른쪽으로는 뒤로부터 방, 마루방 각 1칸, 날개채로 넘어가면서 안사랑방이 이어지고, 안사랑방 앞에는 부엌이 있다. 우익사 앞에는 안대청에서 이어지는 마루가 붙어 있다. 원래 좌익사 앞에도 마루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부재를 연결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문간채와 중문채가 정침의 전면에 중첩되고 이들을 거쳐서 안채로 들어가도록 하였으므로, ㅁ자 안마당 공간은 더 내밀하게 보호된다. 하지만 좌우 익사를 길게 내어 안마당을 앞뒤로 길게 하여 안마당 깊은 곳까지 햇빛을 들게 하였다.
측면으로 돌출한 누각 형태인 사랑채의 건축 기법이 뛰어나며, 전면에 덧붙은 초가 지붕의 문간채로 인하여 외관이 독특하고 내외에 다양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조선 중 · 후기 경상북도 권역의 ㅁ자집 중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최근 예천박물관에 기탁한 종택 소장 자료는 이 종택이 문중과 지역의 문화적 구심점으로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