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곡동 옥천종택(注谷洞 玉川宗宅)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집안의 세거지(世居地)인 영양군 주실마을에 있으며 1983년에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의 옛 집이다. 조덕린은 주실마을 입향조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01613)의 증손자이고, 부친 조군(趙頵, 16291669)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학문을 배웠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94년(숙종 20) 낙향하였는데 이때 옥천종택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1708년(숙종 34) 이후 관직이 몇 차례 제수되었으나 1725년(영조 1)에 당쟁에 관하여 상소했다가 노론(老論)의 탄핵으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에 유배가 풀린 후 봉화 옥천 옆 창주정사(滄洲精舍)와 사미정(四未亭)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임명되었고, 이때의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병으로 사직한 후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1736년(영조 12) 서원 남설을 상소하다 1725년의 상소 문제로 다시 노론에게 탄핵받았다. 1737년(영조 13) 이현일의 제자들이 스승의 무고함을 상소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제주로 유배 가던 도중, 강진(康津)에서 죽었다.
옥천종택은 1694년 조덕린이 낙향한 후 짓기 시작하였고 초당(草堂)은 1695년(숙종 21) 완성하였다. 사당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되었다.
주실마을 가운데의 대종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즉 조지훈 생가에 비하여 마을 북쪽 가장자리 야산의 경사지에 자리잡은 집이다. 규모는 호은종택보다 작다. 남서향의 호은종택과 달리 남동쪽을 향하며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마을 북쪽의 비탈길을 올라가 1993년에 복원된 3칸 맞배지붕 대문채를 지나면 석조 기단 위에 좌우로 초당과 정침(正寢)이 있고 정침 오른편으로 돌아 들어간 곳에 1칸 규모의 일각문(一脚門)과 담장을 갖춘 사당이 있다.
ㅁ자형 정침은 정면 5칸 중앙의 문간을 기준으로 왼쪽에 안사랑, 오른쪽에는 마구간을 개조한 온돌방과 고방이 차례로 달려 있다. 사랑은 평면, 입면상 돌출하지 않고 정침의 ㅁ자형의 일부를 이룬다. 문간을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 높은 기단 위에 정침의 몸채가 있고 안마당 양쪽에 각 3칸 규모의 좌익사(左翼舍), 우익사(右翼舍)가 있다. 몸채에는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상방과 도장방, 오른쪽엔 우익사와 몸채에 한 칸씩 걸친 안방과 그 뒤의 마루방 한 칸이 있다. 우익사에는 안방과 정면의 고방 사이를 잇는 2칸의 큰 부엌이 안마당으로 열려 있고, 이 부엌 벽에 정침 우측 밖으로 나가는 판문이 있다. 좌익사에는 상방의 아궁이를 설치하고 정침 왼쪽 밖으로 나가는 판문을 단 개방된 한 칸, 그 다음에 고방, 그리고 안사랑 뒷면에 이어지는 작은 마루방인 샛마루가 있다. 정침 지붕은 맞배지붕을 조합하여 구성했는데 낮은 쪽의 안사랑과 고방 지붕 위에 좌우익사(左右翼舍) 끝의 박공(牔栱)이 걸리고, 좌우익사 지붕 위에 몸채의 큰 맞배지붕이 올라 앉았다.
초당은 1695년(숙종 21)에 지었고 노인이 머무는 큰사랑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 역할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중앙의 대청과 좌우의 온돌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이다. 민도리 홑처마에 초가지붕을 덮었다. 정면에 설치한 마루에 평난간을 깔아 일반 초가보다 격식 있는 외관을 갖췄다.
사당은 맞배지붕집이다. 정면 3칸에 전퇴(前退)를 달아 측면 1.5칸이며 초익공(初翼工)으로 꾸몄다. 유림이 옹립한 향불천위(鄕不遷位)인 조덕린의 제사를 지내는 부조묘(不祧廟)이다. 내부엔 조덕린과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신주를 모신 주독(主櫝)과 후처 진주강씨(晉州姜氏) 신주를 모신 주독이 감실(龕室) 1개에 모셔져 있다.
17세기 말 조덕린이 분가하며 지었고 조덕린이 사후에 향불천위로 옹립되면서 성립된 영양 주실마을 내의 소종가로, 경상북도의 주거와 씨족마을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소박한 안사랑과 글 읽는 별당이자 큰사랑 역할을 하는 초당을 별도로 건립한 것은 특징적이다. 또한 정침의 안방이 오른쪽에 배치되고 사랑방이 왼쪽에 배치된 것은 경상북도 ㅁ자집의 일반적 구성과는 좌우가 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