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 ( )

주생활
유적
문화재
1705년(숙종 31), 평산신씨 신한태가 청송군 파천면 중평마을에 지은 종택.
유적/건물
건축 양식
ㅁ자집, 뜰집
건립 시기
1705년(숙종 31)
규모
7동/325.75㎡
소재지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376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재(2014년 6월 19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376
내용 요약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은 1705년(숙종 31) 평산신씨 신한태가 청송군 파천면 중평마을에 지은 종택이다. 변형된 ㅁ자형 정침과 별도로 지은 대규모 새사랑채, 서당, 영정각 등의 건물로, 종택에 요구된 기능을 세분하여 수용한 주택이다. 이웃한 분가들은 건축적으로 종택과 상통하는 특징을 가지면서도 종택의 규모를 넘어서지 않고 있어, 같은 마을 내에 형성된 종택과 분가들의 건축적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정의
1705년(숙종 31), 평산신씨 신한태가 청송군 파천면 중평마을에 지은 종택.
건립 경위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平山申氏 判事公派 宗宅)은 판사공파 27세손인 신한태(1663~1719)가 1705년(숙종 31) 청송군 파천면 중평마을에 건립하였다. 평산신씨 판사공파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고려 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태복판사(太僕判事) 신득청(申得淸)을 분파조(分派祖)로 하며, 조선 전기에는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에 살다가, 임진왜란 이후 중평마을에 들어와 주2 한다. 종택을 지은 신한태는 판사공 신득청의 27세손이다. 현존 건물은 안채와 새사랑채, 대문채, 서당, 영정각 등이다. 새사랑채는 1784년(정조 8)에 건축하였고 안채는 이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건물의 연혁은 불분명하다.

변천

조선 말까지 종택의 서쪽으로 후손들의 분가가 나란히 차례로 형성되었다. 종택 바로 서쪽에는 신한태와 같은 27세손인 신한창(申漢昌, 1669~1749)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을 31세손 신치구(申致龜, 1777~1851)가 증축한 서벽고택(棲碧古宅)이 있고, 그 서쪽에는 신치구의 동생 신치학(申致鶴, 1800~1885)이 분가해서 지은 집에 그의 손자 신우호(申遇浩, 1857~1918)의 호를 따 이름 지은 사남고택(泗南古宅)이 있다.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은 1990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4년 종택과 서벽고택, 사남고택이 함께 묶여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에 주3을 해체하여 수리하였다.

형태와 특징

청송군 소재지에서 국도 31번 청송로를 따라 오다가 서쪽으로 중평교를 건너 직진하면 북쪽의 산과 남쪽의 사수천 사이에 낀 중평마을이 나온다. 종택은 마을 뒷산 기슭에 남동남향으로 입지해 있고, 같은 산기슭에 분가인 서벽고택과 사남고택이 늘어서 있다.

종택 남쪽 담장에 있는 정면 5칸의 솟을대문채를 지나면 마당 우측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5량가 팔작지붕집인 별당, 일명 새사랑채가 서 있다. 전면과 우측의 큰 면적을 대청에 할애했으며, 마루와 접한 사랑방은 전면 3칸, 측면 1칸에 걸쳐 ㄴ자로 들어선 특이한 평면이다.

마당 건너 북쪽에 정침이 있는데, 사방 5칸의 ㅁ자형에 정면에서만 좌우 모서리에서 옆으로 1칸씩이 더 돌출해 7칸이 되었다. 정침 정면 중앙의 중문 1칸 외에 좌우의 6칸은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 책방과 마루 등이 차지하고 우익사(右翼舍) 1칸도 사랑방에 이어지는 뒷방이다. 정침의 사랑 공간도 적은 규모는 아니지만, 종택의 사랑 기능에 공간이 더 필요하여 새사랑채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중문 안의 안마당 너머 안대청은 정면 3칸, 깊이 1칸이고 좌우로 안방과 상방을 두었다.

안채 우측 뒤 북동쪽에 사당이 남동향해 있는데, 전퇴칸이 없이 꾸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이다. 안채 좌측에는 북서쪽의 측간과 텃밭들이 있고, 그 너머 북서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서당이 있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에 전면 툇마루와 중앙의 대청을 꾸몄는데, 소규모 강당, 재실의 전형적인 구성이다. 1798년(정조 22)에 창건하고, 1820년(순조 20)에 주4 후, 1854년(철종 5)에 주5 상량묵서(上樑墨書)가 있다. 서당 앞의 4칸 규모의 초가집은 주6가 사는 아래채였다고 한다.

서당 서쪽에 붙어 정면 1칸, 측면 1.5칸 맞배지붕집인 영정각이 있다. 1580년(선조 13)경에 제작된 21세손 신종위(申從胃, 주1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다. 영정은 지금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기탁되었다.

분가인 서벽고택은 영정각 서쪽에 인접해 있는데, 서벽고택 동측 마당과 영정각 사이는 석축의 단차로 공간이 나뉘어 있다. 종택 안채처럼 ㅁ자집의 정면 좌우에 1칸씩이 돌출한 형태이지만 종택 안채보다 규모가 작다. 그보다 서쪽으로 좀 떨어져 있는 사남고택의 전체 규모는 서벽고택과 비슷하지만 안대청은 서벽고택보다 더 작다. 사남고택의 ㅁ자 정침 우측으로 돌출한 사랑채는 다른 지붕과 떨어진 팔작지붕을 올려 별동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의의 및 평가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은 변형된 ㅁ자형 정침과 별도로 지은 대규모 새사랑채, 서당, 영정각 등의 건물로, 종택에 요구된 기능을 세분하여 수용한 주택이다. 이웃한 분가들은 건축적으로 종택과 상통하는 특징을 가지면서도 종택의 규모를 넘어서지 않고 있어, 같은 마을 내에 형성된 종택과 분가들의 건축적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문화체육부 문화재관리국, 『’95년도 문화재수리보고서』 하권(문화체육부 문화재관리국, 1997)
김우원 편, 『경상북도 문화재도록』 2(동해문화사, 1995)
전국건축문화자산 자료조사 행사위원회, 『전국건축문화자산 8권: 대구 경북편』(’99 건축문화의해 조직위원회, 1999)

인터넷 자료

디지털청송문화대전(http://cheongsong.grandculture.net)
주석
주1

신종위가 살던 때의 사대부들은 주자가례와 달리 위로 3대 조상까지만 제사 지낸 경우가 많았는데, 신종위는 부친의 유훈에 따라 고조까지 4대 조상의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또한 외할머니 박씨의 봉양과 3년상을 극진히 하고 외가에 후손이 없자 외가 묘사에 비용을 댈 밭을 장만했다. 축산군수, 용양위 부호군 등을 역임하고 은퇴했으며, 80세에 고령의 관원에 대한 은전으로 정3품 절충장군이 되었다.

주2

한 고장에 대대로 살다. 우리말샘

주3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 우리말샘

주4

건축물 따위를 옮겨 짓거나 세우다. 우리말샘

주5

절이나 왕궁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짓다. 우리말샘

주6

주인집에 거주하지 않고 독립된 가정을 가지면서 자기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노비.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조(租)만 바쳤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우종(영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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