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릉재사는 1606년에 조선시대 문신 류영순이 선조인 조선 개국원종공신 류빈의 묘소를 수호하고자 지은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있는 재사이다. 유릉산 기슭 경사지에 건물들이 튼ㅁ자로 안마당 주위에 모여 있고 그중 왼쪽의 추원재를 큰 누마루가 있는 다락집으로 꾸몄다. ㅁ자집 또는 튼ㅁ자집으로 꾸미고 큰 누마루를 설치한 경상북도 재사 건축의 사례 중 하나로 가치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소박하지만 강하게 모접기한 팔각기둥, 마루의 큰 재목 사용 등 세부 특징은 류영순이 경상도관찰사로서 관 소속 대목들을 동원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종릉재사(鍾陵齋舍)는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있는 전주류씨(全州柳氏) 영흥공파(永興公派) 파조 류빈(柳濱, 13671448)의 묘소, 이른바 종릉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인 조선 중기 문신 유영순(柳永詢, 15521630)이 1606년(선조 39)에 건립한 재사이다. 류빈은 훗날의 조선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1382년(우왕 8)에 진사시(進士試)에 동방(同榜) 급제해서 서로 친분이 있었고, 1386년(우왕 12)에 맹사성(孟思誠), 길재(吉再)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조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자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역임하였다. 류빈이 죽자 태종이 예장(禮葬)을 명하여 지관(地官)이 자리를 정하였고 무덤을 종릉이라 불렀으며, 영천군수가 매년 제물을 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중지되었다고 구전한다. 그러나 역사적 문헌의 기록은 없다. 류영순은 1606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종릉에 묘비를 찬하여 세우고 묘소를 지킬 종릉재사를 지었다.
1652년(효종 3)에 유심(柳淰, 1608~1667)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묘직을 두었다. 근대 이후에는 1993년부터 3년간 중수 공사가 있었다.
종릉재사는 유천마을 남동쪽에 400m 떨어진 유릉산 남동쪽 기슭에 남서향으로 위치한다. 재사 북서쪽에 수십 미터 들어간 산 속에 류빈의 무덤이 있다. 마을로부터 길을 따라 서쪽에서 접근하면 근래에 설치한 담장의 대문을 지나 앞마당 남서쪽 모퉁이로 들어선다. 앞마당 오른쪽 끝에도 별도의 작은 문이 있다.
앞마당 북쪽의 경사지에 기존 건물들이 튼ㅁ자로 안마당 주위에 모여 있다. 제일 낮은 남쪽의 문간채와 마당 오른쪽의 익랑채(翼廊채)는 1칸 너비 3량가의 맞배지붕집이고 서로 ㄱ자로 연결되어 정면 측면 각 5칸의 행랑채(行廊채)를 이룬다.
안마당 뒤편의 높은 막돌 허튼층 석축의 왼쪽에는 돌계단이 붙어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 오른쪽으로 평면이 제일 큰 건물이 있는데, 문중에서 정침(正寢)이라 부른다. 정침은 정면 4칸이고 측면은 2칸 규모이나 1칸 앞뒤로 반칸 규모의 전후퇴가 붙은 것이고, 5량가 맞배지붕을 올렸다. 정침과 익랑채는 직접 몸채가 붙진 않지만 정침 처마는 익랑채 지붕 북쪽 끝과 살짝 맞물린다. 정침 오른쪽 절반은 큰 부엌이고 왼쪽 절반에는 온돌방 2칸을 두고 방 앞쪽은 툇마루, 뒷쪽은 퇴칸과 고방을 꾸몄다. 정침 정면 툇마루는 청판을 도리방향으로 길게 깔아 장마루를 꾸몄다. 정면 기둥은 마루 위부터 사괘맞춤 아래까지 강하게 모접기하여 팔각형으로 만들었는데 고급스러운 고식 기법이다.
안마당 왼쪽의 추원재(追遠齋)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집이고, 2층 다락집이다. 추원재 아래층은 안마당에서 드나드는 낮은 수장공간이고, 2층은 석축 위에서 출입하는데 북쪽 끝 방 1칸 외에는 누마루이다. 추원재는 2층집이라 고직사(庫直舍)보다 높게 솟아서 멀리서도 두드러져 보인다. 가까이에서 보아도 추원재의 누마루 쪽은 자연목의 굴곡이 남은 굵은 둥근 기둥들을 결구하고 누마루의 안마당 쪽에는 헌함과 평난간을 달아 재사의 다른 건물들과 구분되어 보인다.
종릉재사는 1993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2016년에 재사가 수호하는 류빈의 묘소와 석물 또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ㅁ자집으로 꾸미고 큰 누마루를 설치한 경상북도 재사 건축의 사례 중 하나로 가치가 있다. 추원재의 누마루와 정침 툇마루 기둥 형태를 다른 부분과 달리한 것은 중요한 공간을 드러내는 건축적 방식의 하나이다. 전체적인 의장은 소박하지만, 강하게 모접기한 팔각 기둥의 설치, 마루의 큰 재목 사용 등의 세부 특징은 류영순이 경상도관찰사로서 관 소속 대목들을 동원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