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응인 영정 및 재실 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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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한응인(1554∼1614)의 영정과 그를 제향하는 사당에 전해오는 제례 용구(祭禮用具) 9점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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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한응인(1554∼1614)의 영정과 그를 제향하는 사당에 전해오는 제례 용구(祭禮用具) 9점 일괄.
내용

경기도 안산시 사사동청주한씨충정공파 종중 소장. 199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응인의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 · 유촌(柳村), 본관은 청주, 시호는 충정(忠靖). 조선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으로, 부사직(副司直) 한경남(韓敬男)의 아들이다. 영창대군을 보호하라는 선조의 유교를 받은 일곱 신하의 한 사람으로, 초서(草書) 등 글씨에 뛰어났으며, 한어(漢語)에 능하여 수차례 명(明) 나라를 오가며 조선과의 화합을 이끌어 내었다. 임진왜란 때는 원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예조판서 · 우찬성 · 우의정을 지냈고, 평난공신(平難功臣)을 비롯해 네 차례나 공신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사후인 인조반정 후에 회복되었다.

영정은 세로 164㎝ 가로 91.5㎝의 비단 바탕으로,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으로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全身左顔七分面椅坐像)이다. 두 손을 관복에 넣은 공수자세를 하고 있다. 가는 붓으로 얼굴의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그렸고, 눈썹과 수염은 훈염법을 사용하여 움폭한 곳을 반복된 붓질로 어둡게, 도드라진 부분은 밝게 처리하였다. 키가 높은 오사모, 쌍학에 금채(金彩)를 더한 화려한 흉배, 학정금대(鶴頂金帶), 족좌(足座) 밑에 깔린 양탄자[氈]등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형식이다.

제작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종계무변의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정여립 모반을 고변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던 1590년(46세) 이후로 짐작될 뿐이다.

이밖에 영정을 모신 재실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제 흑칠제구(木製黑漆祭具)가 여러 점 전한다. 교의(交椅:위패를 모시는 의자) 2점, 주독(主櫝:위패를 넣어두는 궤) 1점, 신주(神主:위패) 1점, 제상(祭床) 2점, 향로상(香爐床) 1점, 모사상(茅砂床) 2점 등이다. 이들 제구는 조선후기의 문헌에 소개된 것과 부합되어 조선시대 제구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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