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년(광종 25) 왕융(王融)이 지공거(知貢擧)였던 과거에 장원, 998년(성종 8)에 시랑(侍郎)으로 병부낭중(兵部郎中) 위덕유(魏德柔)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받았다.
『대장경』을 가지고 돌아온 뒤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1007년(목종 10) 경주인(慶州人) 융대(融大)가 신라 원성왕의 원손이라 사칭하여 양민 500여 구를 노비로 삼아 뇌물로 바친 사건에 연루되어 양주(楊州)에 유배되었다.
이 미디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에만 활용하도록 허가받은 자료로서, 미디어 자유이용(다운로드)은 불가합니다.
항목 내용 중 오류나 보충하여야 할 사항을 상세하게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미디어 또는 미디어 설명에 수정하여야 할 사항을 상세하게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대한 문의나 의견을 남겨주시면 검토하여 반영하겠습니다. 처리 결과는 의견·문의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용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남겨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용 시 아래와 같이 출처를 표시해 주세요.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