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파두성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성벽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성벽
건축
유적
문화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삼별초의 대몽 항쟁과 관련된 토성.
이칭
이칭
항파두리성, 항바두리성
유적
건립 시기
고려시대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김통정
높이
3m(잔존)
둘레
3.8km
면적
1,135,476㎡
소재지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번지 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7년 4월 18일 지정)
소재지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번지 외
내용 요약

항파두성은 삼별초 대몽 항쟁 유적이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위치하며 하귀리 해안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해발 140~200m 구릉상에 자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 고적 조에 주 서쪽 40리에 있고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한 뒤 김통정 무리들이 쌓은 것이라고 하였고 고토성 또한 삼별초가 쌓은 것이라 하였다. 조사 결과 항파두성은 내성인 항파두성과 외성인 고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둘레 750m이고, 외성은 사대문을 갖춘 판축 토성으로 둘레 3.8km이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삼별초의 대몽 항쟁과 관련된 토성.
건립 경위

제주 항파두성은 고려시대 삼별초 대몽 항쟁의 마지막 보루로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위치하며, 하귀리 해안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구릉상에 위치한다.

항파두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한 뒤 김통정 무리들이 쌓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적 조에 실려 있는 항파두고성 외에 고토성은 삼별초가 축조한 것이며 둘레 15리라고 한 것과 1272년(원종 13년) 전라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제주로 들어가 내 · 외성을 쌓았다는 기사, 1273년 김방경의 제주 정벌 기사를 참고하면 고토성이 항파두성의 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형태와 특징

항파두성은 내성인 항파두성과 외성인 고토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 북쪽으로 외성과 연접하여 옹성이 자리하고 있다. 내성의 둘레는 750m이고 외성의 둘레는 기록에는 15리라고 하였으나 실측 결과 3.8km이다.

외성은 사대문을 갖춘 판축 토성으로 평면이 긴 타원형을 띠고 있지만 지형에 따라 불규칙한 형태를 하고 있다. 주4는 지형을 따라 경사면 위에 축조되기 때문에 주5 반토를 니은(ㄴ) 모양으로 굴착하여 주8 다음 기저부의 석렬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판축을 위한 영정주를 설치하기 위한 초석을 석렬에서 3~4m 간격으로 석재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시설이 강화중성에서도 확인되었다.

중심 토루는 기저부 석렬 위로 판축하여 올렸고 토루의 내 · 외측에 150~300cm 정도로 기와를 깔아 하단부 및 기저부 석렬을 덮고 있는데 중심 토루와 인접할수록 두껍게 깔았다. 이것은 토루가 침수로 인해 붕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석성에서 보이는 기단 보축 시설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항파두성 외성 중심 토루의 너비는 460~486cm 정도이고 토루 내외의 기저부 보호 시설의 너비는 각각 242~369cm, 170~230cm로 전체 너비는 10m에 가깝다.

내성은 항파두성 외성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며,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 해발 160~165m 사이에 자리하며 둘레 756m로 평면은 방형에 가깝다. 내성의 폭은 4~5m 정도로 내부에는 1열의 기저부 석렬을 설치하고 주6주7를 교차하여 성토하였다. 내부가 비교적 편평한 내성에서는 20동의 건물지와 함께 일상생활 용기인 청자완과 접시를 중심으로 탁잔, 통형잔, 마상배 등과 철제 솥, 철정, 청동 수저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1호 건물지는 석재를 깔아 다른 건물지에 비해 높게 조성되어 삼별초군의 지휘소로 추정된다. 2-1호, 3호, 5호 건물지를 중심으로 다량의 찰갑편과 무구류, 철 슬러그 등이 확인되고 있어 무구 제작 관련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항파두성 내 취수원이었던 구시물 구유〔구시통〕는 지하에서 용출되는 구시물보다 2.5m 가량 내려온 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사각의 테두리 각목과 테두리 곽 내부로 4매의 판목으로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70cm 이상이다. 내부에서 주10 기와편과 청자편이 출토되어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을 점거할 당시의 유적에 해당된다.

의의 및 평가

항파두성은 1273년(고종 14) 6월 이전에 축성이 완료된 것으로 내부 건물지의 중복과 증개축 등으로 보아 김방경에 의해 함락된 후 원의 직접적인 지배를 위하여 상당 기간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항파두성이 제주 유일의 판축 토성으로 축조되었고 내 · 외성으로 이루어진 점 등은 고려시대 토성의 큰 특징을 보여 준다. 또한 제주도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이나 애월목성, 동제원, 송담천 등 제주 지역 항몽 전적지 연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항파두성은 1976년 9월 '항파두리항몽유적지(缸波頭里抗蒙遺蹟址)'라는 이름의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호하고 있으며, 1978년에 유적지 정화 사업을 벌여 이곳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비롯한 관리사 · 전시관 · 휴게소 등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제주고고학연구소, 『제주 항파두리성 외성Ⅰ』(2014)
제주고고학연구소, 『제주 항파두리성 외성Ⅱ』(2017)
제주고고학연구소, 『제주 항파두리성 외성Ⅲ』(2021)
제주고고학연구소, 『제주 항파두리성 내성Ⅱ』(2019)
제주고고학연구소, 『제주항파두리성 내성Ⅲ』(2020)

논문

김용덕, 「제주 삼별초유적의 성격」(『제주 삼별초와 항파두리성의 성격』,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 국내학술대회 자료집, 2016)
주석
주1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八 全羅道 濟州牧 古跡 缸波頭古城。在州西四十里。城中有泉,大旱不渴。高麗元宗十二年,遣金方慶討三別抄於珍島破之。金通精率三別抄來,據貴日村缸波頭里,築此城以拒之。方慶等進攻拔之,令千戶尹邦寶等領元兵四百及官軍一千人,留鎭而還。

주2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八 全羅道 濟州牧 古跡 古土城。在州西南三十六里。周十五里。三別抄所築,今皆頹圮。古長城。沿海環築。周三百餘里。高麗元宗時,三別抄叛據珍島。王遣侍郞高汝林等于耽羅領兵一千以備之,因築長城。涯月木城。在州西四十二里。卽三別抄所築以禦官軍處。今半頹落。

주3

高麗史 世家 元宗 13年(1272) 壬申年 六月 乙卯 遣將軍羅裕, 將募兵一千五百五十餘人, 討三別抄于全羅道. 時賊旣入濟州, 築內外城, 恃其險固, 日益猖蹶, 常出擄掠, 濱海蕭然.

주4

굴착 공사에서, 특정 부분의 지지물로서 임시로 지표에 남긴 커다란 덩어리. 우리말샘

주5

경암이 물, 햇빛, 미생물 따위의 영향으로 부서져 강도가 약해진 상태의 암석. 우리말샘

주6

세토(細土) 가운데에서 점토 함량이 50% 이상인 토양. 우리말샘

주7

모래 성분이 많은 흙. 우리말샘

주8

땅을 반반하고 고르게 만들다. 우리말샘

주9

지붕을 이는 데에 쓰기 위하여 흙이나 시멘트 따위를 구워 만든 건축 자재. 우리나라에는 수키와와 암키와의 구별이 있다. 우리말샘

주10

새의 깃 모양으로 생긴 무늬. 신라와 가야의 토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정의도(한국성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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